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의 역사담론은 필자의 역사관과 맥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이승만, 무신정권(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이 저지른 ‘헌정유린과 법질서파괴로 인한 법준수부재현상’, ‘구타고문살인으로 인한 인권탄압의 정당화’, ‘낙태합법화와 성고문 및 성폭력의 정당화로 인한 생명경시현상’‘악질 친일세력, 일제사생아와 그 후손들의 지배층, 상류층, 주류층의 형성으로 인한 민족정기부재 그리고 일제의 시다바리와 미국스파이양성’, ‘부정부패부조리의 원천인 경상도마피아사단과 전라도마피아사단’ 등의 ‘죽음의 문화’,‘어둠의 문화’, ‘사단의 문화’를 고발하는 동시에, 뉴라이트역사관의 매국노짓거리와 부당성을 단죄하기 때문에 강추!강추!강추!한다.
그러면 통쾌감을 안겨주는 장총장의 역사해설을 일별해보자.
1. 백성과 동반성장한다는 조선 건국이념을 권력욕으로 파괴한 세조와 한명회
조선의 건국이념은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하는 정도전의 도(道) 사상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백성을 무시하고 권력가들이 국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분탕질하고 있는 고려를 붕괴시키고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였다. 즉 조선은 권력가만의 행복을 위한 국가가 아닌 만백성과 함께 행복을 공유하는 이상을 갖고 출발한 나라였다. 태조 이성계의 손자 세종 때에 와서 조선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조선 7대 왕 세조)이 권력욕에 불타 악질 모사꾼 한명회 일파와 함께 정난(쿠데타)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장악한 후 조선은 쿠데타 공신만을 위한 나라로 전락하여 버렸다.
2.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을 이어 대업을 이룰 왕 재목
조선 6대 왕 단종은 1441년에 5대 왕 문종의 외아들(이름 홍위)로 태어났다. 그러나 모후 현덕왕후가 단종을 출산한 후 3일 만에 운명하였다. 할아버지 세종은 장손을 본 기쁨도 채 못 느끼고 소헌왕후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원손은 총명하면서도 덕이 있었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육을 받은 그는 학업에도 매우 뛰어나 세종은 자신의 뒤를 이어 대업을 이룰 왕으로 기대하여 원손을 1448년(원손 8세)에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세종은 세손을 매우 사랑하고 아꼈는데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름 유)이 병약한 세자(이름 향, 문종)가 왕이 된 후 일찍 사망하면 조카인 세손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을 것이 매우 걱정되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몰래 불러 세손의 앞날을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하였고 세손의 부왕 문종도 죽기 전 김종서와 황보인 등 대신들에게 아들을 애절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신숙주와 정인지 등의 배반자가 나와 수양대군에 붙어 정난공신이 되었다.
3. 탐욕의 수양대군과 악질 모사꾼 한명회의 만남
수양대군은 세종의 차남으로 1417년에 태어났다. 글 읽기와 공부를 즐겨한 형 문종과는 달리 말 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무예에 뛰어났던 수양대군은 왕권에 대한 야욕이 대단했다. 그는 병든 형 문종을 보면서 부왕의 후계자는 자기가 되어야 조선이 멋있는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 세종이 장자 상속의 원칙을 고수하며 세손 홍위(단종)를 아끼고 사랑하고 자기를 경계하는 것을 느꼈다. 부왕 세종 사후 왕위를 이은 형 문종은 날로 병이 깊어 갔다. 조카 홍위가 나이가 들기 전에 형 문종이 빨리 죽어 주어야 했다. 수양대군은 병든 형 문종을 죽이기로 계획하고 겉으로는 정치에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뒤로는 서둘러 역모를 같이 할 사람들을 모았다. 그중에 교리 권람이 있었다. 권람은 천하 악질 모사꾼인 친구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해주었다.
4. 한명회 개국공신 집안 손자로 어려서 고아 되고 체구 작아 멸시 받고 성장
한명회와 권람은 둘 다 불우한 소년 시절에 만난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한명회는 한상질의 손자였는데 한상질은 명국에 사절로 가 조선의 국호를 받아온 공신이었다. 한명회는 모친이 임신 7달 만에 칠삭둥이로 낳았는데 어려서 부모가 다 죽어 고아가 되는 불운을 당하였다. 거기다가 신체도 왜소하여 소년시절부터 집안과 동네에서 멸시와 놀림을 받고 자랐다. 권람은 개국공신이며 대학자인 양촌 권근의 손자였다. 부친은 종1품 좌찬성의 높은 벼슬을 지낸 권제였는데 기생첩에 빠져 본처인 권람의 모친을 매일 때리고 학대하다가 버렸다. 권람도 모친처럼 부친 권제에게 많은 구타를 당했다. 부인을 때리는 권제를 말리는 권람의 누이를 부친 권제가 발로 차 죽였다. 권람은 아내를 폭행하고 딸을 죽이는 부친을 보고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출을 했다. 이런 불우한 가정적 배경이 있는 두 젊은이가 유태재의 문하에서 만나 뜻을 같이 하였다.
5. 불만에 쌓인 한명회와 권람은 세상을 지배할 꿈을 같이 만들어
거물 개국공신 집안의 손자들이지만 고아인 한명회와 고아나 다름없는 권람은 소년시절 가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구속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가진 것은 없었으나 명문가의 자손이라 몸과 마음은 자유로웠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마음 속 깊이 쌓인 불만을 세상을 확 뒤집어서 풀고 싶었다. 그들은 공부하여 과거 합격하는 것이 한을 풀고 성공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수레에 많은 책과 술을 싣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권람은 35세 때인 145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451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만나 함께 일을 하면서 수양대군의 사람이 되었다. 한명회는 38세가 되도록 과거 합격을 못하다가 개국공신의 손자라는 배경으로 1452년(문종2년) 음서로 겨우 종9품직인 경덕궁(태조 이성계의 개성 사저)直의 말단 벼슬을 얻었다. 정상적으로 출세를 할 수 없는 한명회는 친구 권람에게 부탁을 하여 수양대군을 만나 그의 책사가 되기를 작정하였다.
6. 수양대군과 한명회, 병중의 문종을 독살로 빨리 죽게 하고 쿠데타에 성공
수양대군을 만나는 순간 간악한 모사꾼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눈에서 왕권 탐욕을 즉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병중에 있는 문종의 장남인 세자(단종)가 어리므로 장년의 수양대군이 왕이 되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명분을 주장하면서 수양대군에게 왕이 될 것을 강력하게 권하여 수양대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13세의 세자가 나이 들기 전에 병중에 있는 문종을 빨리 죽게 해야 했다. 그들은 문종의 의관 전순의를 시켜 문종의 병을 악화시키기 위해 독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는데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 전순의가 1등 공신이 된 것을 보아 독살설은 상당히 유력하다. 문종 사후 세자인 홍위가 왕으로 등극하자 한명회는 아래 그림과 같이 요즘의 SWOT 분석을 한 후 기습작전을 선택하고 죽일 자들의 명단인 살생부(殺生簿)를 작성하였다. 수양대군 일당은 1453년 10월 단종을 보호하고 있는 좌의정 김종서 집을 야간에 습격하여 철퇴로 살해한 후 그와 뜻을 같이하는 대신들을 즉시 대궐로 불러 모두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다. 이 사건이 계유정난인데 정당한 명분이 없어 백성의 지지가 전혀 없었다.
7. 조카와 동생들 죽이고 며느리 둘 성추행하려 한 살인마 세조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곧 왕위(7대 세조)에 올랐고 단종은 상왕으로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세종의 유지를 받드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세조와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다시 왕으로 만드는 거사를 모의하다 김질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모진 고문 속에 죽었다. 세조와 계유정난 공신들은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이유로 단종을 죽였다. 이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총명한 단종이 2~3년 후면 친정을 할 수 있어 수양대군이 왕위에 있는 명분이 없어지므로 서둘러 죽여야만 했다. 세조는 왕권의 찬탈과 권력 유지를 위해 형 문종과 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그것도 부족해 장남 의경세자의 후궁인 소의 권씨와 소훈 윤씨를 범하려다 실패했다. 며느리들을 유혹해 섹스를 하려다 실패하고도 왕으로 있었으니 정말 파렴치 한 인간이었다. 김일손이 이 내용을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함께 사초에 실어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은 사형 당했다. 세조는 몹쓸 피부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는데 세간에서 천벌이라 했다.
8. 정몽주 손녀 둘을 데리고 산 한명회는 친구 외손녀를 노비로 취해
세조가 죽은 뒤 8대 예종 1년에 태종의 외증손자인 장군 남이의 역모 고변 사건이 있었는데 신숙주와 한명회 등 역모 해결 공신들에게 역모 죄인들의 가족들을 노비로 내려 주었다. 남이는 권람의 사위였다. 당시 권람은 이미 죽고 없었다. 한명회는 남이의 딸 즉 친구 권람의 외손녀인 남구을금을 노비로 받았다. 남이는 반역죄로, 남이의 모친은 아들 남이와 성관계를 했다 해서 두 명 모두 사지를 찢어 죽였다. 남이 모친의 근친상간 죄는 조작인지 사실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남이의 처인 권람의 딸은 죽고 없었는데 살아 있었다면 아버지 친구 한명회의 노리개가 될 뻔하였다. 세조 추종 권력자들은 왕으로부터 친구의 부인이나 딸들을 노비로 받아 그들을 짐승처럼 부려 먹거나 노리개로 삼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었다.
한명회는 권력에 탐닉은 물론 색욕도 상당한 것 같다. 기록상으로는 네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 중 두 여자가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庶孫女)였다. 사촌간인 그녀들이 한 남자를 상대로 하여 첩살이를 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로부터 충절로 추앙 받는 정몽주의 직계 핏줄 두 여인으로부터 잠자리 서비스를 받았으니 당시 한명회의 권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 두 왕에게 딸들을 출가시켜 왕비 둘을 만들었고 신숙주의 장남에게는 장녀를 결혼시켜 권력의 네트워크를 극대화하며 73세까지 오래 살았다. 한명회는 몇 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영의정을 하고 공신전을 비롯해 엄청난 재산과 노비를 소유하였음에도 부족해 양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팔아 조선을 부패국가로 망하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 아래는 임금도 부러워한 한명회가 말년에 놀던 정자인 압구정의 모습이다.
9. 여인들 강간과 매관매직 등 세조 공신들 비윤리 경영이 조선 망치기 시작
형 문종과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려고 했다. 왕권과 국방력을 강화하고 국가재정도 확충하는 등 어느 정도 업적은 있으나 왕위 계승 정통성 한계에 부딪쳐 나라를 공신들의 천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는 정통성 문제를 공신들과의 결속으로 해결하려 했다. 세조가 봉한 공신들의 수는 정공신과 원종공신을 합하여 모두 2,300여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약 10,000명인데 이들은 세조가 왕이 되는 바람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공신들은 사람을 죽여도 처벌하지 않는 등 고소조차도 잘 안되어 그들의 악행은 기록조차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일등 공신으로 정승을 지낸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죽이고 양인들의 부인들을 납치해 강간을 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세조 공신 가족들은 양민의 재산과 생명을 해하여도 면책되는 특권을 가졌다. 백성들은 공신들의 대납권(백성들 세금을 대신 내주고 2-3배로 다시 걷어 착복하는 것) 행사로 인한 수탈과 압박 속에서 신음을 하였다. 세조시대는 공신과 공신 가족들 10,000 명을 위한 천국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지옥이었다. 세조 공신들은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여 매관매직을 시작했고 계유정난으로 조선 왕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찬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후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공신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과 재산은 세습되었고 그로인해 조선은 만성 부패에 허덕이다 멸망하였다.
10. 조직의 경영권 승계는 반드시 사회적 통념과 윤리성이 확보되어야
세조의 불법 왕위 찬탈 이후 조선은 공신의 국가로 전락하여 정도전의 조선 창업 정신인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도(道) 사상은 무너지고 권신들의 지속적인 부패로 결국 망하였다. 국가를 비롯한 사회 모든 조직의 경영권 승계는 법과 원칙, 그리고 사회적 통념에 의해 계승되어야 한다. 수양대군 같이 권력에 눈이 멀어 정통 경영 계승권을 가진 자를 죽이고 불법으로 경영권을 찬탈한 자는 정통성이 없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만을 기용하는 등 인사권을 불공정하게 행사하고 정통성 시비 문제의 제기를 못하도록 강력한 독재를 행하게 된다. 정통성 없는 경영권자는 욕심, 의심, 변심의 삼심만 누적되어 성격 파탄에 이르게 되고 그가 경영하는 조직은 창조적 도전 정신이 말살되고 만성적인 부패를 초래하여 아래 그림과 같은 과정을 거쳐 붕괴하고 만다.
조선은 불법의 국가 경영권 찬탈이 여러 번 있었다. 특히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 소현세자가 독살당하고 소현세자 장남 대신 동생 봉림대군(17대 효종)이 왕이 되었다. 그로 인한 왕위 계승의 정통성 시비로 효종부터 21대 영조 때까지 조선은 내내 시달렸다. 22대 정조 사후에는 외척 안동 김씨가 왕위 계승권까지 장악하고 꼭두각시 왕을 세워 마음대로 해먹다가 결국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사회적 통념과 도덕성을 무시한 불법적인 조직 경영권의 탈취와 독점 현상은 국가 조직뿐만 아니라 기업 등 사회 여러 조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현대의 기업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조직들도 정통성 있는 경영권의 승계와 윤리를 바탕으로 한 정도경영을 하지 않으면 조선과 같이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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