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동아일보“청일전쟁이 일본 근대화 승리라고?”(강추!강추!강추!)

아우구스티누스 2014. 10. 1. 07:49

김상운 기자의 보도내용을 강추!강추!강추!하는 이유를 먼저 제시하겠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필자가 수없이 뉴미디어상에 글을 올렸기 때문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필자의 블로그, derbrief@naver.com을 방문해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에선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1. 일본 역사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 역사 문학의 거장, 시바 료타로의(司馬遼太郞, 1923-1996) '사후 정당화‘(after-the-fact justification)의 역사해석을 추종한다. 

시바 료타로의 '사후 정당화의 역사해석' 탄생배경은 다음과 같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사상을 내걸고, 청일, 러일전쟁 등을 일으키며 한반도와 중국대륙 등을 식민지화했다. 패전 후 일제는 자신들이 펼친 군국주의로 말미암아, 속된 말로 쪽팔린 상태가 되었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때 나타난 일제의 역사해석의 구세주가 바로 시바 료타로다. 

그는 세계경제 제2위국으로 등장한 60년대 말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 1968)이라는 소설을 써서 메이지(明治, 1868-1912)의 국가론을 제시하며, 50, 60년에 형성된 구미선진국의 ’공산주의도미노이론‘을 슬그머니 도용하여, 조선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면 일본도 공산주의지배아래 있을 수밖에 없어서 부득불 러일전쟁을 치렀고, 조선을 침략약탈병탄했다고 그럴듯하게 소설화하며 사기 친다. 이것을 역사의 Storytelling이라고 한다. 

사실 일제강점기동안에는 구미선진국조차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평등사상과는 전혀 다른 소수 지배층의 특권과 국민의 노예화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정체대해서 어느 누구도 잘 알지 못했음은 물론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재임 1933-1945, 1882-1945)행정부에서도 그소련의 첩자들로 들끓었지만, 루스벨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련과 우호관계를 가졌다. 그 이유는 유대인계 루스벨트는 구소련지도층들이 거의 자신의 동족인 유대계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제2차세계대전과 6.25동란 이후가 되어서 비로소 마르크스의 짝뚱 공산주의실체를 인식할 정도였다. 

그런데 일제에 의한 1894년 6월-1895년 4월 기간의 청일전쟁, 1904-1905년 기간의 러일전쟁, 1905년의 을사늑약, 1910년의 조선병탄 등은 연대적으로 1917년 10월 러시아의 ‘볼세비키(Bolsheviki)혁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바 료타로는 50, 60년대의 공산주의개념을 근거하여 일제의 한반도의 침략적인 약탈과 만행(蠻行, brutality)을 변호한다. 

2. 일본역사의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

이 논리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뉴라이트와 수구꼴통들의 역사관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면 이 내용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1) 필자는 이것에 대한 반박 글을 수 없이 올려 독자들이 식상해 할 까봐 먼저 한국일보 오피니언 [서화숙 칼럼/9월 13일] ‘거짓말과 친일이 보수인가’라는 사설 일부를 발췌(拔萃)해 올린다.

시작됐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개인소득이 올랐고 주거와 보건이 향상됐다, 산업국가로 나아갈 토대가 생겼다,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제가 얼마나 많은 자산을 수탈해갔는가, 얼마나 많은 양민을 끌고 가고 죽였는가도 밝혀야 한다. 식민체계에 길들이기 위한 교육과 공안체계도 밝혀야 한다. 그래야 개인에게 풍요가 확대돼 보이나 철저한 수탈의 기반에서 이뤄졌다는 식민지의 참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상식을 벗어난 주장을 한다. 의병을 '소탕'하고 '토벌'했다고 쓰고 자생적 근대화의 토대가 될 뻔했던, 동아시아 전체에 자주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 동학농민혁명을 '전통적 질서를 복구'하려는 '민란'이라고 쓴다. 일제의 강제동원 수치는 일본 공식통계보다도 적고 관동대지진에서 일어난 한국인 학살도 쓰지 않았다. 이런 역사교과서라면 보수교과서가 아니라 친일교과서이다.”“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에서 근대화가 

(2) 미국 오바마(Barack Obama, 1961-)가 흑인출신으로 최초로 미국 제44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미국의 흑인역사를 ‘백인문화와 문명의 시혜’라고 해석하지 않고, '노예의 역사'라고 기술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곧 결과가 좋다고 원인과 그 과정의 피 맺힌 박해의 수난의 역사를 축복의 역사로 규정하지 않는다.

(3) 그루지야출신 땅딸막한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은 러시아 공산당 및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창설자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유서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 스탈린은 지나치게 무자비하므로 권력을 독점하게 할 수 없고, 현서기장직에서 해임시켜 집단지도체제를 택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그 유서를 은폐하고 정적들을 숙청하여 당서기장이 된다. 

그는 구미선진국의 시스템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경제선진화를 성취하여 미국과 세계를 양분할 정도로 구소련을 역사상 최대의 국력과 영향력을 누리는 초강대국으로 우뚝 솟게 해, 세계에 냉전시대,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이 표현한‘철의 장막‘(鐵─帳幕 iron curtain)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1929년부터 1953년까지 구소련을 무자비한 숙청과 강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철권통치와 개인우상화를 통해 정권을 유지했다.

세계시민들과 역사가들은 스탈린의 뛰어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정의, 사랑, 평등, 평화, 인권존중 등의 하늘의 가치를 저버렸기 때문에 스탈린을 최고의 살인 독재자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일제의 조선의 침략약탈병탄을 '근대화의 시혜'라고 설레발치는 역사기술과 방법은 그릇되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김상운 기자의 보도내용을 일별해보자.


日교수, 자국 역사교과서 왜곡 질타
“일본 역사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시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비판했다. 그는 ‘일본 역사교육 속의 청일전쟁과 조선: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최근 개최한 ‘청일전쟁 120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사카이 히로미 오사카대 교수(조선사 전공)는 일본 역사교육을 정면으로

사카이 교수는 1904년 청일전쟁을 서술한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예로 들었다. 이들 교과서에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우리나라는 근대국가로서 실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됐다’(이쿠호샤 171쪽), ‘청일전쟁은 근대화에 뒤처진 청에 비해 군사력에서 앞선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교이쿠슛 168쪽)처럼 자화자찬을 담고 있다. 이쿠호샤(育鵬社) 교과서는 지유샤(自由社)와 더불어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계열로 분류된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왜곡해 청일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교이쿠 교과서는 ‘1875년 강화도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정부는 군함을 이끈 사절을 보내 조선에 압력을 가하고 조일수호조규(주: 조선을 독립국으로 해 당시 청과 조선의 관계를 부정했다)를 맺어 조선을 개국시켰다’(158∼159쪽)고 기술했다. 조일수호조규 이전 조선은 독립국이 아닌 것처럼 쓴 것이다. 사카이 교수는 “조선은 내정과 외교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 독립국이었다”며 “조선이 청의 속국이었음을 강조해 청일전쟁, 나아가 한반도 병합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새역모 계열을 제외한 5개 중학교 교과서가 청일전쟁을 설명하면서 게재한 삽화 ‘낚시 놀이’도 도마에 올랐다. 일본에서 17년간 체류했던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가 그린 이 삽화는 개울가에서 일본과 청나라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고 이때 다리 위를 지나던 러시아인이 지켜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카이 교수는 이 삽화에는 러시아발 안보 위기를 부풀려 일본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분석한다. 이쿠호샤 교과서는 ‘청일전쟁이 발발한 무렵 대국 러시아가 태평양 쪽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 우리나라에서도 인접한 조선이 러시아 등 구미열강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면 자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다는 위기감이 강해졌다’(170∼171쪽)고 적었다. 사카이 교수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이 아시아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발상이 일본 대학생들 사이에서 뿌리 깊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