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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한우의 '大學衍義 리더십'] "자칫하면 걸리는 '간신의 덫'"(추천)

아우구스티누스 2014. 9. 22. 09:09

이한우 문화부장 역사담론은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정확한 분석보다는 주관적인 사실 나열로 이어져 매우 아쉽다. 그러면 이부장이 놓친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서인 송강 정철이 남인 이산해와 유성룡에게 당한 이유를 이부장은 송강의 독서부재(당시 고위 관리들의 필독서였던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보지 않았다고 추정)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 지혜의 부족 두 가지를 드는데, 그것은 결론차원에서 역으로 추정하는 것이며, 게다가 관동별곡 등과 같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송강에게 독서부재라는 주홍글씨 새기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것 보다는 치밀치 못한 정철의 기질과 성격면에서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의 대승에는 바다에선 성웅 이순신제독이 있었다면, 육지에선 명재상 유성룡이 있었다. 두 분 모두 조선인에게서 볼 수 없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이고 전술전략에 뛰어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대가 좌뇌형인간이라면, 송강은 감성적이고 즉흥적이며 추상적이고 종합형인 안전불감증의 우뇌형인간인데다 다혈질의 소유자의 술꾼으로 성격이 치밀하지 못함은 물론 매우 급하며, 비정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묘청의 난에서 주도면밀한 좌뇌형 김부식이가 허점투성의 우뇌형인 정지상과 묘청을 제압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끝으로 이 부장이 충신과 간신을 알아낼 줄 아는 리더의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은 매우 좋았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이부장의 역사교훈을 일별해보자.


조선 선조 때의 정철
이산해·유성룡에게 속아 '광해군 세자論' 먼저 거론···선조 분노 사서 파직·유배
군주 마음가짐이 중요
뛰어났던 唐 현종·漢 무제···귀 녹이는 혀놀림에 당해 간신은 리더가 만드는 것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2월 막 우의정에 오른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와 영의정 이산해와 더불어 3정승이 임금을 뵙고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산해와 유성룡은 동인(이어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당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을 못 낳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암암리에 '광해군 세자론'이 퍼져 있었다. 정철은 유성룡의 제안이 있었고 이산해와 유성룡은 같은 당파이니 서로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3정승 중에서 가장 힘이 막강한 좌의정이니 임금을 만나는 경연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다.

경연에서 정철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선조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문제는 그 순간 이산해와 유성룡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산해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다. 결국 정철은 파직당해 마천령 넘어 함경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여기서 정철이 옳고 이산해가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당시는 정여립의 난 직후였기 때문에 서로 피 말리는 정쟁을 하던 중이었다. 문제는 이산해가 구사한 술수가 지극히 고전적 수법이라는 사실이다.

진덕수의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따르면 한나라 무제 때 급암(汲�)은 공손홍(公孫弘)과 더불어 황제에게 아뢰기로 했다가 정작 황제 앞에 이르자 급암은 자신의 품은 바를 남김없이 다 말했는데 공손홍은 오히려 면전에서 아첨을 일삼았다. 이처럼 함께 아뢰기로 하다가 면전에서 표변하는 수법은 당나라 현종 때도 등장한다.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사례다. 당나라 현종은 삭방절도사 우선객(牛仙客)이 비용도 절감하고 무기 개량도 잘했다 하여 봉읍에서 실제로 받는 조세인 실봉(實封)을 높여주려 했다. 이에 충직한 성품의 장구령(張九齡)은 재상 이임보(李林甫)에게 말했다.

"실봉을 상으로 주는 것은 명신(名臣)과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인데 어찌 변방의 장수를 고위직에 올리면서 이리 급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공과 더불어 힘껏 간언을 올려 봅시다."

아첨에 능한 이임보는 그러자며 허락했다. 그러나 정작 황제에게 나아가 뵈었을 때 장구령은 할 말을 다 했지만 이임보는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이임보는 물러나와서 장구령의 말을 우선객에게 흘렸다. 다음 날 우선객이 황제를 알현하여 울면서 호소하자 황제는 다시 우선객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고 조정의 논의에 부쳤다. 여기서도 장구령은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면서 한사코 반대했다. 그 순간 이임보가 "재능이 중요하지 사람됨을 말합니까? 천자가 사람을 쓰겠다는데 어찌하여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황제는 이임보는 꽉 막혀 있지 않아 좋다고 여겼다.

이 사건에 대한 진덕수의 평가다. "이임보가 장구령을 배반한 것도 공손홍이 급암을 속여 넘긴 것과 똑같다. 그리하여 급암과 장구령은 죄를 얻어 폐척을 당한 반면 공손홍과 이임보는 뜻을 얻어 권세를 누렸다. '천자가 사람을 쓰겠다는데 어찌하여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는 말은 임금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사정을 보여준다."

다시 조선 선조 때로 돌아간다. 만약에 정철이 당시 고위 관리들의 필독서였던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제대로 보았다면 거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낡은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충신이냐 간신이냐를 떠나 정철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어두웠고 제대로 된 독서가 없었기 때문에 버젓이 책에 나와 있는 사례를 답습해 귀양까지 가는 고초를 겪었다는 점에서 크게 동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중국의 두 가지 사례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당시 황제가 누구였느냐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는 중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대단한 임금이고 현종 또한 말년에는 양귀비에게 빠져 몰락하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뛰어난 임금으로 불릴 때였다. 즉 치적 면에서 어느 황제에게도 손색이 없는 걸출한 황제들이었는데도 공손홍이나 이임보의 귀를 녹이는 혀 놀림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은 오늘날 국가 조직이건 기업과 같은 사조직이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진덕수는 임금이 공(公)보다는 사(私)에 마음을 쏟을 때 간신들이 활개를 친다고 진단한다. 조직 내에 충신이 많으냐 간신이 많으냐는 결국 리더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