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전라도사람의 특징!

아우구스티누스 2014. 8. 30. 11:51

어제(29) 새정치민주연합 모 의원이 야당은 선, 새누리당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야당은 민주화, 여당은 산업화의 공을 각각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필자는 그 의원이 어떤 인물인가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더니 1952227일 생, 전남 장흥군강진군영암군출신으로 나왔다.

 

그런데 야당은 민주화, 여당은 산업화의 공을 각각 갖고 있다는 황의원의 담론은 그릇되었다.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해 말하겠다.

 

1. ‘민주화의 오석(誤釋)

 

한반도 역사이래로 개혁이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그 불가능을 깬 것이 민주화.

 

민주화는 주로 전라도출신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야당의 몫이 아니다.

 

민주화를 성취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생명까지 바쳐야 했다. 그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함석헌 선생님 등의 민족 지도자들

 

둘째, 김수환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프로테스탄트의 목회자들을 비롯한 각종 종교와 시민단체들

 

셋째, 정치권의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한 YS, DJ

 

넷째, 자유독립정신이 투철한 애국애족시민들

 

다섯째, 구미선진국 출신의 외국인들과 선교사들 등

 

위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지, 야당은 그저 뒤따라갔을 뿐이다.

 

2. '산업화'의 오석(誤釋)

 

5.16쿠데타와 12.12사건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자들이 심어놓은 헌정유린과 법질서파괴에 기초한구타고문살인’, ‘낙태합법화’, ‘성적 타락’, ‘빨갱이 주홍글씨 새기기등의 사탄의 사망문화그리고 과정과 노력과 노동을 무시하며 오직 결과만을 강조하는 한탕주의의 조폭문화와 토론이 부재한 복종의 노예문화를 희석시키기 위해서 탄생시킨 용어가산업화이다. 이 구호는 국민들 합의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황의원 스스로가 여권에게 이런 선물을 안겨줌으로써 인권존중의 생명문화민주화가치가 퇴색됐다.

 

황의원이 여당에게 선심을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전라도는 일왕가계’, ‘조선왕조’,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를 배출시킨 품격 높은 곳이다. 게다가 조선지배층의 유배지로 진짜 양반고장이며 머리가 명석하다. 뿐만 아니라 성웅 이순신제독은 전라도와 도민을 애국애족의 땅과 애국애족의 백성이라고 극찬했다.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서재필과 매천 황현 등의 우국지사를 배출한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이며, 현대사에선 5.18 민주화운동으로 국민의 자유와 독립의 주체성을 세계에 알린 위대한 곳이다.

 

그런데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전라도사람들의 기질과 성격에 대해서 항상 의구심을 품어왔다.

 

1. 지난 60년 대선 때 윤보선과 박정희가 다툴 때 박정희의 손을 들어주며 5.16쿠데타를 합법화해주고, 그 이래로 경상도마피아집단으로부터 피해당하지 않으려고 전라도마피아집단을 조직하거나 아니면 경상도정권에 굽실거리며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이나 고위공직자리를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아부하는 기생노예인간유형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지난 대선 때 DJ측근을 비롯해 상당수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 측에 가담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내들이 경상도출신이라서 그런가 또는 올드 보이라 불러주는데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서인가?

 

3. 노무현정권 때의 사람들이 박근혜정부에 들어가선 노무현시절의 북한이나 북핵의 외교국방경제의 정책을 고스란히 버리고 줏대없이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선천적으로 영혼없이 태어났는가?

 

4. 순천 및 곡성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박근혜대통령의 충직스런 돌쇠라 그렇게 하였는가?

 

위의 사건들은 정상적이며 상식적 차원에서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인생관이 연상돼 씁쓰레하다.

 

다음의 담론은 본내용과는 관계가 없어, 별도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전라도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술한다.

 

김종인박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박근혜 대통령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대선의 흥행몰이, 화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였다.

 

김박사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박근혜 후보 캠프 국민행복진추진위원장 및 공동선대위원장자격으로 이 정책의 콘텐츠를 만들어 정권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토사구팽 당하자, 다음과 같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항변한다.

 

“(경제민주화는)결과적으로 국민을 현혹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16개월을 보니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임기 중에도 다시 그것을 추진 할 수 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당시 후보의) 선거 전략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김박사는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7-1964)의 손자다. 그러면 가인에 대해 살펴보자.

 

가인은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직접 의병항쟁에 참전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독립투사들의 변호인이었으며,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70세로 정년퇴임하였는데, 6·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다.


가인은 대법원장 재임 9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확립하고 사법권 독립을 공고히 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인은 우남 이승만 독재정권이 정부시책에 협조하는 사법부가 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강골형 독립지사의 가인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 수도 부산에서 재선과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인과 경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강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사건을 일으키자, 가인은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가인은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역임하면서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독재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가인에 의해 이루어진 사법권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정신이 지난 무신정권에 이어 박근혜정부와 경상도마피아사단의 이익을 위해 훼손되고 있어 안타깝다.


김박사는 가인손자답게 전라도정권창출과 민주화에 도움을 주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경상도정권창출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 정권에서 공직을 맡았다.

  

지난 박정희 정권당시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하면서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였고, 노태우 정부(1988.02 ~ 1993.02) 시절 보건사회부 장관(1989.07-1990.03)을 역임한 후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1990.03-1992.03)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동산 투기억제를 위하여 아파트 분양가 상한가를 도입했고, 14대 국회의원(1992.05-1994.09) 재직 중, 1993년 안영모 당시 동화은행장에게 21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김박사는 전두환 정권에서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다가, 6·29 선언 뒤, 1987년 제9차 헌법개정 때에 헌법 제1192, 경제민주화항목을 요구하며 관철시켰다고 알려져 있다(그런데 여전히 논란 중임)

 

유감스럽게도 경제민주화의 화신으로 불리는 김박사는 전북 순창 출신인 조부 가인의 길을 버리고, 경상도마피아사단에 가입해, "비록 지는 해이지만 석양의 노을처럼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고 싶다"JP처럼 양지의 길을 걸었지만, 결국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엔 야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전라도는 일본열도처럼 변신변절배반의 뒤통수문화를 가진 곳이라는 오해를 정상적인 것으로 대한민국국민모두에게 각인시켜 준 듯하다.

 

사실 전라도출신들의 정치가나 공직자들이 경상도마피아집단에 가입하는 경우엔 거의 그 아내가 경상도출신이거나 아니면 경상도정권에서 공직을 맡은 가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소신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러면 고려 태조 왕건(太祖 王建, 재위 918-943, 877-943)이 유훈(遺訓)으로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수록되어있으며, ‘신서십조 信書十條또는 십훈 十訓이라고도 칭함) 가운데 제8조에 근거하여전라도부침(浮沈, ups and downs)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자.

 

8조의 내용은 한반도를 강타하며, 그 지역에서 살거나 고향을 둔 사람들을 오랜 세월 동안 지독한 몸살을 앓도록 한 페스트였다.

 

그러면 그 내용을 살펴보자.

 

여덟 번째에 이르기를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바깥의 산형 지세가 배역(背逆)해 있고 인심 또한 그러하니, 그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 ()의 잡역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을 면하거나, 혹 왕후 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用事)하지 못하게 하라

 

9434월 태조가 총애하던 개국공신이자 중신(重臣)으로 충남 당진 면천 호적 출신으로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인 박슬희(朴述熙, ?-945)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를 전했는데, 박슬희는 원래 왕건보다 궁예를 추종한 사람이었다. 왕건이 후백제 당진 출신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921(태조 4) 왕건은 29명의 왕비와 더불어 259녀를 두었는데 25명의 아들들 가운데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소생인 맏아들 무(: 혜종으로 즉위)9세가 되자 그를 정윤(正胤: 태자)으로 책봉하려고 하는데, 장화왕후의 집안(나주 오씨)의 세력이 미약한 것을 들어, 중신들이 심하게 반대하자, 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박술희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그 목적은 또한 박슬희를 무의 후견인으로 삼아 왕권의 세력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왕건은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柘黃袍: 태자가 입는 옷)를 담아 오씨에게 내려주고, 오씨가 이것을 박술희에게 보인다. 박술희는 태조의 의도를 짐작하고서 군신회의에 나아가 직접 무를 태자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여러 군신들은 박술희의 기세에 눌려 반대의 뜻을 내지 못하고, 태조는 무를 태자에 책봉한다. 후에 박술희는 또한 태자 무와 함께 후백제 토벌에 큰 공을 세우는 동시에 왕위 쟁탈전 막고 국정 안정화 기틀을 마련한다.

 

태조가 임종할 때, 박술희는 군국대사(軍國大事)와 태자 무를 새 왕으로 옹립, 보좌할 것을 유언 받아서, 무가 혜종(惠宗, 재위 943-945, 912-945)으로 즉위하고 통치하는데 도움을 주어 사후 엄의(嚴毅)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되고,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을 정도로 최고의 실세였고, 혜종도 전라도 나주 출신의 왕건의 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씨에서 태어나 제2대 왕이 되었는데, 8조가 적용될 리 만무하다.

 

이런훈요십조의 제8조의 조작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 한다.

 

태조가 평생 사표로 삼았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의 대가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와 최지몽(崔知夢, 906-986)은 전라남도 영암출신이고, 왕건이 말년을 함께 한 동산원 부인(東山院夫人: 견훤의 사위로서 고려에서 삼중대광을 역임한 박영규의 딸이며, 고려의 제3대 왕 정종의 정비 문공왕후, 2비 문성왕후 박씨와 자매간임)은 견훤의 외손녀로 전라남도 승주(昇州)태생 순천박()씨다.

 

뿐만 아니라 왕건 이후에도 후백제 가운데 전라도출신들이 계속해서 등용이 되었다는 사실은 제8조가 조작되었음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려 제8대 왕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992-1031)시대 거란이 침입하여 훈유십조원본이 고려사사초와 함께 소실되었는데, 태조사후 80년 후에 고려사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할 때에 신라의 고관출신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손자 제안(齊顔, ?-1046)이 사가(私家)인 최언위(崔彦撝, 868-944)의 손자 최항(崔沆, ?-1024)의 집에 있던 문서(원본)라며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변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그 까닭은 현종이 신라계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음은 물론 현종 즉위 이전까지 훈요십조가 고려 왕조 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출현했기 때문이다. 최항 혹은 최제안 등의 신라계가 왕건 시대에 후백제출신들이 왕건 측근으로 활동한 사실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며 백제계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고의로 조작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21세기에 와서도 전라도출신들이 훈요십조’8의 부당성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조선왕조가 전주이씨 집안이 아닌가?

 

여하간 DJ가 대통령이 되자, 새 세상이 왔다면서, 거리낌 없이 호남출신이라고 밝히고, ‘부러’, ‘랑께라는 프랑스어의 방언을 공공연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호남사람의 한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다.

 

하지만,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남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독재수령체제의 본관이 전주라고 한다. 그러면 남한에 거주하는전주김씨의 가문은 모두 빨갱이인가? 뿐만 아니라 6.25전쟁은 충녕대군인 세종계열이 아닌 양녕대군 가계(조선왕조가문에선 이승만을 노예출신으로 본다)인 이승만 정권과 전주김씨집안의 김일성과의 정권투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사학자들도 있다. 결국 한반도는 전주이씨출신(?)의 이승만 정권과 전주김씨출신의 김일성 정권은 모두 전라도출신들이 장악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라도사람들은 이런 역사를 자랑하기는커녕 지금도 경상도사람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가수 이은하 할멈의 노랫말처럼 아리송하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형식적으론 국가이지만, 내용적으론 지역주의왕조라고 할 수 있다. 통일한반도가 되면 그 때 비로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수구꼴통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낙인찍고, 그의 통치스타일에 실망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가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타파를 위해 수고한 것은 한반도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성취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된다.

 

여하간 전라도마피아사단과 경상도마피아사단과의 갈등과 분쟁으로 대한민국이 혼돈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이곳 출신들은 더 이상 대통령후보로 나와서는 안된다. 앞으로 100여 년 동안은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을 배제한 인물이 차기 대통령으로 선정되어야 한다.

 

성서는 지역주의의 극복과 해법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개역한글. 시편 133:1-3)

 

“11.그뿐이랴! 혼자서는 몸을 녹일 길이 없지만 둘이 같이 자면 서로 몸을 녹일 수 있다. 12.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 삼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공동번역. 전도서 4:11-12)

 

“19.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20.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공동번역. 마태복음 1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