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조선 태종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월호침몰사건!

아우구스티누스 2014. 5. 21. 08:53

양인남자(良人男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종부법’(從父法)과 모친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 혹은 수모법隨母法’)에 의해서 운명이 좌우되었는데, 조선 제3대 왕(太宗, 1367-1422, 1400-1418) 태종은 재위 14(1414) 예조판서 황희(黃喜)의 의견을 받아들여 종부법을 시행한다.

 

태종실록 14627일은 이를 입증한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賤人)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6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 그리고 경순공주의 남편인 이제를 죽이고, 정도전과 남은 등 자신의 왕권도전에 저항하는 공신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양녕대군을 끼고 자신의 왕권을 넘어보는 네 명의 처남을, 양인을 노비로 만들었다는 것을 구실로 처치해버리고, 후엔 아들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세종의 장인가계를 박살낼 정도로 폭군이었지만, 노비제도를 개혁하여 조선백성의 인권향상을 위해 노력한 성군인 동시에, 1408524일 부친 이성계가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자, 부친 서거소식을 듣고 땅을 치면서 발을 구르고 울부짖은 효자였다. 세종은 바로 부친의 성군과 효자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어 부친의 폭군이미지를 상쇄시킨 효자다.

 

조선조정은 노비 수를 줄이고 세금을 납부하는 자영농민 수를 늘려야 했던 반면에, 양반 사대부들은 종모법을 채택해 재산을 늘리려 했지만, 태종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조선백성을 위해 노비제도를 개혁한다.

 

오히려 애민정신의 아이콘인 세종대왕이 역설적으로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대개 천한 여인이 날마다 그 남편을 갈아치워서 행위가 금수와 같은데 그 자식은 다만 어미가 있는 것만 알고 아비가 있는 것은 모르므로 종모법(隨母之法)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부친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게 한 법을 혁파해서 어미를 좇아 천인이 되게 하는 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세종실록 14315)” 라고 주장하는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허조(許稠) 등 대신들의 종모법환원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 대신 공비(公婢: 관청 여종)가 출산했을 경우 100일의 휴가를 더 주게 하며 남편에게도 30일간의 출산 휴가를 주는 등 21세기 서민복지정책을 실시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종모법환원이 조선멸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면 태종의 성군모습에 대해 살펴보자.

 

재위 12(1412)에 태종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부친과 기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모친의 신분에 따라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로 있던 장영실 (蔣英實)의 뛰어난 기술재능을 보고 관직천거제인 도천제에 입각하여 그를 조정에 발탁한다.  장영실은 1421년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명나라로 유학을 떠나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온 후 정5품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세종 5(1423) 노비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로 임명되어3품으로 파격 승진 하는 등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서 영광의 시대를 갖는다. 그러면 장영실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자.

 

1. 1424년 중국 명나라의 체재를 참고하여 물시계를 만들어 그 공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된다

 

2. 1432년 김돈(金墩이천() 등을 도와 간의대(簡儀臺)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의 제작을 감독하며간의(簡儀)로 잰 당시의 한양이 북위 38도 부근으로 밝혀낸다.

 

3. 14336 간의를 더욱 발전시킨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며 그 공으로 정4품인 호군(護軍)벼슬로 승진한다

 

4. 1434년 김빈()과 함께 자동시보(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든다.

 

5. 1434년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甲寅字) 제작을 감독한다

 

6.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을 완성한다

 

7. 1438년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玉漏)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별감(埰訪別監)이 되어 동(()의 채광·제련을 지휘, 감독한다

 

8. 1441년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 세계최초)와 한강과 청계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을 감독, 완성한다

 

9. 상호군(上護軍)으로까지 특진하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투옥, 파직되고 이후 역사기록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것에 대해선 지면 관계상 후에 논하겠다.

 

위에서 보듯이 태종의 애민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장영실이 조정에 있었고, 장영실이 있었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창제와 함께 과학기술문화,   세계 최고의 르네상스시대가 세종 때 펼쳐진 것이다

 

태종의 종부법이 없었다면 장영실은 존재할 수 없었고, 세계최고의 조선 르네상스시대는 재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자신의 쿠데타정권을 정당화하며 왕권강화차원과 아들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는 등의 폭군의 길을 택한 동시에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성군의 길을 택했는데, 박근혜 댓글 대통령은 독립군색출체포에 앞장 선 악질 친일세력, 민족의 반역자.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박정희처럼, 태종과는 정반대의 길, 사망문화, 암흑문화의 상징인 유신시대의 주역들과 유신시대의 찬양자들인 올드보이를 택해,  이번 세월호침몰사건에서 아름다운 어린 학생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는 자신의 쌩얼인 냉혈인간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주 무능함은 물론 책임회피형에다 비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직도 큰 문제인데, 인간성 자체도 대통령감이 아니라 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