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의 배경을 통해서 본 대한민국의 미래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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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1799의 프랑스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영어 French Revolution) 이후, 곧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이 발발하기 때문에, 이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의 배경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고찰해보자.
1. 왕정의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 선언
왕실의 재정위기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1) 루이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
루이14세는 재정 전문가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를 재무부장관(1665-1683)으로 기용하여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해,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며, 그는 절대 군주로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여, 대왕 루이(프랑스어 Louis le Grand; 영어 Louis the Great),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 영어 the Sun King)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실시하여, 왕실의 재정위기를 초래한다.
1) 베르사유궁전(Château de Versailles, 1634; 영어 Palace of Versailles)의 신축
국무(Affaires d'Etat)보다 음악이나 사냥을 좋아하는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 1601-1643)는 ‘공디’ 가문의 영지인 베르사유에 관심을 갖고, 1624년에 매입하여 사냥을 위한 작은 별장을 짓도록 한다. 청색의 석반석으로 된 지붕과 흰색의 돌, 붉은 벽돌 벽으로 아담하게 지어졌기에 ‘카드로 만든 성’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루이 14세는 부왕의 사냥용 별장을 19세 때인 1662년부터 서거하는 1715년까지 5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호화로운 베르사유궁전을 개조한다.
루이 14세는 1682년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1792, 1754-1793)가 혁명군에 의하여 강제로 파리의 ‘루브르 궁전’으로 궁정을 옮기기 전까지, 107 년간 절대왕정의 권력의 중심지이자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프랑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이 필리프 1세(Louis-Philippe Ier, 재위 1830-1848, 1773-1850)에 의해 박물관으로 변신하고, 루이 필리프 1세는 1837년에 왕실 근위병들이 훈련을 하던 연병장(Place d`Armes: 현재 주차장으로 이용)에 ‘루이 14세’의 기마 동상을 설치해, 관광객을 맞이하도록 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질서와 균형, 조화와 논리적인 형식을 대표하는 르네상스식과는 달리 바로크(baroque) 건축의 대표작품이다. 바로크란 단어가‘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한 것처럼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이며 파격이나 우연과 자유분방함, 기괴한 양상 등을 추구한 왕실예술을 대변한다.
둘째, 프로이센 빌헬름 1세(Wilhelm I. 프로이센의 국왕 1861-1888, 독일 제국의 황제 재위 1871.1.18.-1888, 1797-1888)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普佛戰爭; Franco-Prussian War, 1870-1871)에서 차례로 승리한 뒤, 1871년 이곳에서 독일 제국 황제 즉위식을 가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의 베르사유 조약이 1919.6.28에 거울의 방(프랑스어 La Galerie des Glaces; 영어 The Hall of Mirrors or The Gallery of Mirrors)에서 이루어졌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거울로 되었는데 길이 73m미터, 폭 10m미터, 높이 12m미터의 방인데 루이 14세가 17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한 17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7개의 벽면으로 나누고 17개의 거울 벽면과 17개의 유리창으로 구성 되어 총 578개의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2) 1685년 10월‘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의 반포
그는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앙리4세(프랑스어 Henri IV; 영어 Henry IV, 나바라왕 재위 1572-1589, 프랑스왕 재위 1589-1610, 1553-1610)가 프랑스 내에서 천주교 이외에도 칼뱅주의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낭트칙령’(프랑스어 Edit de Nante; 영어 Edict of Nantes)을 1685년 10월‘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의 반포로 폐지시키고, 그 후 프랑스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한 칼뱅 파가 ‘위그노전쟁’의 당시처럼 유럽의 각국으로 망명하여, 프랑스국력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낭트칙령’의 폐지의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1674-1709년 동안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the father confessor of King Louis XIV of France)인 페르 프랑수아 드 라 셰즈(Père François de la Chaise, 1624-1709) 프랑스 대주교는 예수회출신이다. 그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고해실에서 자기 며느리와 잠자리를 나눈 루이 14세의 약점을 붙잡아 퐁텐블로 칙령의 서명을 이끌었다고 밝히고 있다.
교회사를 보면 오컬트 바티칸은 자신들이 불리하면 조약을 맺지만, 자신들이 자신감이 생기면 그 조약을 폐기하는 패턴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오컬트 바티칸은 세계시민을 섬기는 기독교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지배를 위해 권력의지를 향유하는 비기독교의 단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컬트 바티칸의 고해성사는 죄의 용서와 억제보다는 고급정보교환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되었다.
3) 전쟁
① 팔츠공령(公領) 상속 전쟁(1688-1697)
팔츠 선제후인 카를 루트비히(독어 Karl I. Ludwig, Kurfürst von der Pfalz; 영어 Charles I Louis, Elector Palatine, 재위 1649-1680, 1617-1680)는 1671년에 19세의 딸 엘리자베트(Prinzessin Elisabeth Charlotte von der Pfalz 또는 Liselotte von der Pfalz; 영어 Princess Elisabeth Charlotte, 1652-1722)를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Philippe I, Duke of Orléans, 1640-1701)의 둘째 부인으로 혼인시켰다. 1685년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카를 2세(독어 Karl II; 영어 Charles II, 재위 1680-1685, 1651-1685)가 후사가 없이 죽자, 그의 사촌 필리프 빌헬름(Philipp Wilhelm, Kurfürst von der Pfalz; 영어 Philip William, Elector Palatine, 재위 1685-1690, 1615-1690)이 팔츠 선제후국을 상속하게 되고,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동생과 딸의 결혼 사실을 근거로 팔츠의 상속권을 요구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는 천주교 측 4명(마인츠, 트리어, 쾰른, 보헤미아<현재 체코>), 기독교 측 3명(작센, 브란덴부르크, 팔츠)이었기 때문에 팔츠공령(公領) 상속 문제는 미묘했다. 일단 루이 14세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대동맹 전쟁War of the Grand Alliance; 9년 전쟁, 1688-1697)을 개시한다.
②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1700년 에스파냐 왕인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1700, 1661-1700)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톨레도 대주교의 압박으로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公)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d'Anjou)가 펠리페 5세(Felipe V, 1700.11.1.-1724.1.14., 1724.9.6.-1746.7.9, 1683-1746)로 즉위하자, 영국은 신대륙 무역 확보를 위해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도 이에 합류하며, 이 세 국가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개시한다. 그런 가운데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네덜란드어 Vrede van Utrecht)과 1714년의 라슈타트바덴 조약으로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 전쟁이 종결된다.
프랑스는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받아 정치적 권위를 얻는 대신 식민지 영토를 잃고 전쟁으로 인해 국고는 파산에 이르고, 루이 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1715년 9월“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이 유언은 볼테르가 멋대로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2) 친애왕(le Bien-Aimé; 영어 the Beloved)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1774, 1710-1774)
1)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의 살롱 문화(백과전서파지원)
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38)
프랑스와 스페인이 폴란드 왕위 계승에 관여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힘을 저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 프랑스의 경제는 피폐해진다.
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
신성 로마 황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Karl VI, 1711-1740, 1685-1740)에겐 셋 딸만 있었는데, 장녀만 생존하고, 둘째 딸 마리아 아나(Maria Anna, 1718-1744)는 형부의 동생 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 공자(Karl Alexander von Lothringen und Bar, 1712-1780)와 결혼해 남편이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한 사이 아이를 사산하고 2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셋째 딸 마리아 아말리아(1724-1730)는 6세 때 죽는다. 그래서 카를 6세는 23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 1717-1780)에게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계승하고, 테레지아는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자신의 남편 프란츠 1세(Franz I, 재위 1745-1765, 1708-1765)가 잇도록 한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는 무관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재위 1740-1786, 1712-1786)는 고대 게르만법인 살리카법전(라틴어 Lex Salica; Salic Law)을 근거하여 여성의 왕위를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작위와 영지가 세트이기 때문에 여성이 결혼할 경우 영토나 작위가 뒤죽박죽된다. 중세에 영주의 외동딸이 결혼할 경우, 결혼지참금 명목으로 엄청난 영토를 가지고 시집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실례가 영-프간 백년전쟁임)고 주장하며, 석탄, 철, 납 등 광석이 풍부한데다 인구가 100만명에 달하며,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 지역이고, 프로이센과의 유일한 국경인 ‘슐레지엔’(독어 Schlesien; 영어 Silesia; 현재 실레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폴란드에 귀속)을 넘겨준다면 왕위 계승을 인정하겠다고 공언한다. 1600만의 백성을 거느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220만 명에 불과한 프로이센의 갑질에 분노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미 1739년에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앙숙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차에, 선전포고 없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2년에 프리드리히 2세와 단독 강화를 하며, 브레슬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거의 모든 슐레지엔을 영토를 할양하기로 약속하고(철학자와 예술가, 사상가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신의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전쟁광으로 비판하며 베를린과 프로이센을 떠나 계몽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프랑스로 건너감), 숨을 고른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4년에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였다가 다시 패배하며, 1748년 10월 18일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또는 아헨 조약(Treaty of Aachen)의 성립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권이 승인되었으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가 인정되어 7년 전쟁의 원인이 된다.
4) 7년 전쟁(1756-1763)
18세기의 세계대전인 7년 전쟁(1756-63)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슐레지엔의 탈환을 꾀하여 앙숙 프랑스 마담 퐁파두르(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와 손잡고 러시아 여제 엘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1741-1761, 1709-1762)까지 끌어들여 슐레지엔 탈환을 위해 일생일대의 숙적 프로이센에 포위망을 배치하자, 프리드리히는 선전포고 없이 선제공격에 나서며, 7년 전쟁이 시작된다. 엘리자베타 서거 후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는 표트르 3세, 재위 1762.1.5.-1762.7.9., 1728-1762)가 즉위하며 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프리드리히가 오스트리아에 일격을 가해 승리를 거두어 마침내 1763년 2월 10일 두 나라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이 확정된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결과로 유럽의 신(新)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며, 이때부터 확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300여 개의 독일 내 소왕국, 공국들을 정복하고, 100여년 후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독일 통일의 밑거름은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프로이센을 최강국가로 회복시키고 자신은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 프리드리히 대왕(독어 Friedrich der Große; 영어 Friedrich the Great)으로 평가받으며. 샤를마뉴(프랑스어 Charlemagne; 라틴어 Carolus Magnus; 독어 Karl der Große; 영어 Chales the Great; 프랑크 국왕 768-814, 서로마황제 800.12.25-814.1.28, 742?-81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or Napoleon I,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1804-1814, 1815, 1769-1821)와 함께 유럽의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45년 패전 직전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나치스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 재위 1934-1945, 1889-1945)는 방공호에서 측근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기를 낭독하게 하고 갑자기 미국과 영국이 화평을 요구해 상황이 변하지 않을까 기대했을 정도다.
대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나는 철학자로서 인생을 살았으니 그렇게 죽고 싶다. 절대로 화려한 의식이나 치장을 하지 말 것이며 나를 따르는 행렬 없이 조촐히 상수시 궁 테라스 옆에 잠들고 싶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11마리가 죽거든 내 옆에 묻어 달라!"
로코코 건축의 백미인 포츠담의 여름별궁 상수시(상수시Sans Souci란 프랑스어로 ‘근심 없다’는 뜻이다.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쓰던 대왕이 궁의 이름을 작명하였고 스스로 건물 기본 스케치까지 하였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산수지山秀支’라 표기) 궁전 테라스에 11마리의 반려견들과 함께 묻힌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에는 언제나 감자가 올려 져 있는데, 독일에 감자를 보급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독어 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 영어 Humboldt University of Berlin) 앞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마상이 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 쟁탈전이 동시에 발생하였다. 북아메리카에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영어 French and Indian War; 프랑스어: Guerre des Indiens français, 1755-1763)의 결과로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동맹국 스페인에 할양했는데, 이는 스페인이 패전으로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한 대가였다. 스페인은 영국에 플로리다를 할양한 대가로 쿠바의 아바나를 손에 넣었고, 조지 워싱턴은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후에 미국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귀중한 실전 경험을 익힌 것이다.
(3)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1792, 1754-93)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 본명 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1757-1834)은 미국 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또는 미국혁명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1783: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미합중국의 독립이 선언된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래의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재위 1789.4.30.-1797.3.3., 1732-1799)을 만나, 소장에 임명되고 참모로 기용된다. 이것은 워싱턴이 라파예트를 이용해 프랑스 내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고, 나아가 프랑스의 참전을 끌어내려는 정치적 계산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독립전쟁 승리 후 워싱턴의 라파예트 광장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는 수십 곳의‘라파예트’이름을 딴 시와 타운,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 등이 세워지고, 2002년에는 미국 명예 시민권을 받는다.
루이 16세는 미국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라파예트의 명성을 듣고 직접 라파예트를 만난 후, 영국을 견제하는 차원에 미국독립전쟁에 참여한다. 군사비지원으로 재정궁핍에 빠져 1788년에 디폴트를 선언한다.
절대왕정이 무너진 후 천주교 국가 프랑스는 기독교 국가 미국의 독립과 발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미국에‘자유의 여신상’(영어 Statue of Liberty; 프랑스어 Statue de la Liberté’오른손에는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이,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 라틴어 JULY IV MDCCLXXVI’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미국 독립선언서’가 들려 있음)을 선물한다.
2. 앙시앵 레짐(구체제; Ancien Régime; 영어 Old or Former Regime: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군주정체를 가리킴)
삼부회(三部會; 프랑스어 États Généraux; 영어 Estates General)는 앙시앵 레짐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5%미만의 제1신분(The 1st Estate성직자the clergy), 제2신분(The 2nd Estate귀족the nobility: 공작duke, 후작marquis, 백작earl-영국 이외의 대륙에서는count, 자작viscount, 남작baron)은 면세특권을 향유하면서 관직을 독점하고 토지까지 사유화한다.
제3신분(The 3rd Estate)은 이론적으로는 서민(the commons)이나 실제로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유산계급-안전하고 윤택한 성 bourg안 에 거주하던 프랑스 시민)를 가리켰으나 마르크스주의 이후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본가 계급과 이를 소유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prolétariat무산계급)로 구분하지만, 당시 프랑스혁명에서 제3신분은 부르주아지, 곧 의사, 변호사, 부유한 상인과 같은 시민 계급만 해당되고, 농민, 노동자는 이에 속하지 않을 정도로 유명무실했다.
제3신분은 봉건적 의무와 과중한 세금만 부담하고, 참정권이 없어서 자기들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혁명의 전주곡인 고전적 부르좌-자유주의 혁명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3. 계몽사상과 살롱문화 그리고 카페문화
(1) 계몽사상
화학과 생물학에 심취했던 철학자 겸 문인인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 철학과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수학자 겸 물리학자인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1717-1783)가 공동 편찬한 ‘백과전서’(프랑스어 Encyclopédie, 1751-1772; 영역 encyclopedia)는 유럽 최고의 지식인 150명의 계몽 사상가들이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3명만 소개하겠다.
1751년 로마교황청에서 금서목록(라틴어 Index Librorum Prohibitorum; 영어 List of Prohibited Books)으로 정한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에서 삼권분립(입법, 사법, 행정)을 주장한 샤를-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Joseph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프리드리히 대왕; 독어 Friedrich der Große; 영어 Friedrich the Great, 재위 1740-1786, 1712-1786)와 독일 태생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Catherine II; 재위 1762-1796, 1729-1796)의 사랑을 받으며, 역사철학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볼테르(Voltaire; 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 1694-1778) 그리고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사회계약론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교육학자, 음악평론가로 프랑스혁명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다.
3명 가운데 루소의 저서가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1753년에 디종의 아카데미(the Academy of Dijon)가 “인간 사이에 있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되는가?”(What is the origin of inequality among people, and is it authorized by natural law?)라는 현상 논문을 모집하자 루소는 이 논문을 써서 응모했으나 낙선하고, 2년 뒤인 1755년 4월 ‘인간불평등기원론’(프랑스어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 영어 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우승을 차지한 현상공모 논문은 불평등을 원죄의 결과로 설명한 한 기독교 사제의 것이었다.
루소는 이 저서에서 재산의 과다가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빈곤한 자와 부유한 자 사이의 불평등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21세기 관점에서 해석하면 사유재산과 과학기술이 불평등의 기원이다. 이런 사상은 공산주의이면서, 건강하며 부유한 삶보다는 가난한 삶을 옹호하기 때문에 매우 그릇된 사상이다.
루소는‘사회계약론: 정치적 권리의 제원리’(프랑스어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1762; 영역 The Social Contract: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에서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English Civil War, 1642-1651) 때에 국왕파로서 활약한 영국의 로버트 필머(Robert Filmer, 1588-1653)와 프랑스의 칼뱅파 위그노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 등이 주장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Theory of the Divine Right of Kings: 국왕의 권력은 신神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지상의 여하한 것으로부터도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상)을 비판하며,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 재민설(主權在民說; popular sovereignty or sovereignty of the peoples' rule)을 주장하며,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준다.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가 백과전서파를 지원하여 왕실재정파탄을 이끈다. 결론적으로 루이 15세의 애첩이 루이 15세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꼴이 된다.
(2) 살롱문화와 카페문화
프랑스 앙리 4세(프랑스어 Henri IV; 영어 Henry IV, 나바라왕 재위 1572-1589, 프랑스왕 재위 1589-1610, 1553-1610)가 궁정 안에 살롱(Salon)을 개최한 것이 그 시초이다.
살롱문화(Salon Culture)는 17, 18세기에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번영하였다. 살롱(Salons)은 대한민국의 ‘룸살롱’(room salon)과는 다르며, 단순한 사교장이나 오락장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지식과 교제를 추구하기 위해 대화술(the art of conversation)을 익히는 사회적 모임이다. 프랑스 부르주아지 여성들이 매주 또는 매일 정규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집을 오픈하면 남녀와 노소, 신분과 직위 그리고 국적을 가리지 않고 20명에서 40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과학, 철학, 정치, 문학, 예술, 도덕 등을 함께 토론하며, 가볍게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 공연을 즐기며, 춤을 추고 대화의 꽃을 피우며, 자연스럽게 ‘지적 토론의 장’ 이나 ‘계층과 계층 간의 이해의 장’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이성적 도덕적 및 미적 능력을 개발한다.
살롱은 계몽사상을 창출하는 산실과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전령사의 역할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낳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프랑스어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영어 existence precedes essence)라고 주창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80)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하여 호텔에서 잠자고 카페에서 일하며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면서 카페문화(Café Culture)를 선도했다.
대한민국에도 무선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코피스족’(coffee office:카페를 일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람들), 대학가 커피전문점 주요 고객인 ‘카페브러리족’(cafe+ library: 카페를 도서관처럼 활용하는 사람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낸 학부모가 다른 학부모와 함께, 혹은 학원 강사들을 만나 사교육 관련 정보를 교환하는 주요 장소가 커피전문점이 되면서 ‘아카데미맘’이 형성되었다.
대한민국은 알코올중독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술은 마시면 잠이 오기 때문에 일에 지장을 준다. 이와 반면에 커피는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있어 마시면 정신이 들고 일에 열중케 해, 일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자기발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선 음주문화가 아니라 카페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4. 천재지변으로 인한 서민경제파탄
홍수, 가뭄, 추위 등으로 농산물수확량이 감소하고, 물가폭등으로 서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감자가 당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사회에서 식량의 대용으로 등장했다.
16세기 초 유럽은 남미 페루에서 감자를 들여왔지만, 구약성경의 말씀과는 달리 감자가 씨앗이 아닌 줄기로 자라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감자 먹기를 꺼려했다.
프로이센의 경우 프리드리히 대제가 국민들 앞에서 몸소 감자 시식회를 열어,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주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로이센의 흉년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프리드리히 대제는 ‘감자 대왕’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6세는 옷의 단추 구멍에 감자 꽃을 꽃아 장식했고, 왕비 마리아 앙투아네트도 감자꽃을 나누어주거나 머리에 감자꽃 장식을 달아 감자를 홍보했다.
5. 종합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프랑스 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1799) 및 그 전후를 둘러싼 혼란과 전쟁을 목도한 후, 세계시민으로 눈을 돌리며, 71세 때‘영원한 평화를 위하여’(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1795; 영역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Sketch)를 출판한다. 이 책의 등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1946년에 해체됨) 규약에 반영되고, 1948년 국제연합(United[ju:náit] nations) 헌장에 반영되어 현실화된다.
한스 큉(Hans Küng, 1928-)은 62세 때 세계평화를 위한 저서로‘세계윤리구상’(독어 Projekt Weltethos, 1990; 영역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을 내놓는다.
이 두 사람의 제안은 권력의지(정치)와 의식주문제(경제)에 둔감한 탁상공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첫째,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1939) 등을 몸소 체험한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1928-1960 뉴욕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 등의 저서에서 인간에겐 하나님의 형상과 원죄가 내재하기 때문에 개인윤리의 목표로 생의 완전한 조화의 이상적 상태의 원리인 사랑과 사회윤리의 목표로 인간의 죄에 의해서 감염된 불완전한 세계의 원리인 정의를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개인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풀 수 있지만, 집단들 간의 관계는 항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며, 힘의 비율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집단이기주의(group egoism)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의로운 사회제도와 사회정책이 수립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은 매우 구체적이라 호감이 간다. 뿐만 아니라 라인홀드 니버의 부친을 비롯해 동생 H.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2)는‘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1951), ‘책임적 자아’(The Responsible Self, 1962)의 저자로 유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표자이고 누이 훌다(Hulda Niebuhr)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 교수를 지낸 학자라 매우 믿음이 간다.
둘째, 영국 성공회에서 20세기의 성자로 3명을 추앙한다.
그들은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고백교회(독어 Bekennende Kirche; 영어 Confessing Church)의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영원한 증인으로 1945년에 순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한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침례교회 목사, 엘살바도르의 군부독재에 항거하다 성당에서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1917-1980) 로마 가톨릭 대주교다.
필자는 본회퍼의 단어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값싼 은총’(독어 die billige Gnade; 영어 cheap grace), ‘값비싼 은총’(die teure Gnade; costly grace), ‘궁극적인 것’(최종적인 것; 독어 Letztes oder das Letzte; 영어 the final),‘궁극이전의 것’(최종이전의 것; 독어 Vorletztes oder das Vorletzte; 영어 the penultimate) 등이다.
이 단어들 가운데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을 차용하겠다.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나라’이고 ‘궁극이전의 것’은 인류역사이래로 인간을 자유하게 하여 창조정신과 더불어 책임감을 부여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AI시대를 대비한 건강하며 건전한 복지국가건설이다. 전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실현되는 것이고, 후자는 정통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현실에서 차선적으로 실현해야 할 기독교문화다.
공산주의는 독재자가 다수를 물질과 정신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경제적 가난에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단체로 존재해온 오컬트 바티칸은 프랑스혁명의 이전 상태인 제1신분(오컬트 바티칸), 제2신분(정치지도자 및 소수 초부자) 그리고 제3신분(세계시민)을 구축하기 위해 네오마르크시즘을 지향하기 때문에, 정통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강력하게 저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