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예수회가 주도한 임진왜란’(예수회선교실패)(5) YouTube!!!
어제(15일) 강의한 ‘천주교 예수회가 주도한 임진왜란(5)’을 YouTube로 올렸다.
ㅣㅚ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1596년 7월 마닐라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하던 중 동중국해에서 풍랑을 만나 10월 19일 시코쿠(사국四國)의 토사 해안가에 스페인의 무역선 산 펠리페(에스파냐어 San Felipe; 영어 Saint Philip) 호가 좌초된다. 도요토미는 일본 법률에 따라 좌초한 배의 모든 교역 물자를 압수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불응했던 산 펠리페 호의 선장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스페인의 군사력에 의해 귀속된 세계 각국의 영토를 보여 주며 자신들의 무력을 과시하고, 모든 선교사들이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 전 세계로 흩어져 자신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엄포한다.
이 사건으로 비위가 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의 일본의 수도인 교토와 도요토미의 본거지인 오사카성 그리고 시가 지역에서 전교 활동하던 사제와 신도들을 체포하여 처형할 것을 명령하여, 프란시스코회 수사 6명과 예수회 수사 3명(일본인 첫 예수회 수사 성 바오로 미키三木), 일본인 15명의 24명이 체포되어, 이들이 혼슈(本州)와 규슈(九州) 사이 해협에 자리 잡은 시모노세키(下關하관)에 도착했을 때 교토에서부터 이들을 따라온 두 일본인 신자가 또 다시 기리시탄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돼 모두 26명(일본인 20명 가운데 수도원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12살, 13살, 15살의 소년이 3명, 외국인 6명: 에스파냐 4명, 포르투갈 1명, 멕시코 1명)이 1597년 1월 3일 교토(京都)와 호리가와(堀川) 거리(通)에서 왼쪽 귀가 잘린 채 교토 시내를 끌려 다니며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당하고 오사카를 거쳐 나가사키까지 800km(또는 1, 000km)에 달하는 죽음의 행진을 시작한다. 그들은 손은 뒤로 묶인 채 눈과 비를 맞으며 나가사키(長崎장기)까지 한 겨울의 험한 길을 맨발로 걷고, 2월 5일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니시자카(西坂서판) 언덕(일본의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한다. 이것이 ‘나가사키 26성인(聖人) 순교’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십자가 위에 그대로 방치하였다가 여름이 되어서 매장하게 되었고, 십자가를 세웠던 자리에 26본의 동백나무를 심고 그 때부터 이곳을 순교자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독교의 인격적인 선교정책을 실시했다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 데, 천주교는 최고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보다는, 바티칸제도와 교황의 전 세계의 지배를 위해 그 나라의 최고의 통치자를 천주교도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국민들도 천주교도가 되며 자신들의 통치자의 명령을 따르기 보다는 교황의 지시를 순종하는 동시에 천주교의 모든 재산을 바티칸으로 귀속하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현재의 바티칸의 존재는 이런 실례를 잘 보여준다.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와 주세페 M.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 1807-1882)의 협력으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 Risorgimento, 1750-1870)을 완성하여 1860년 근대 통일 이탈리아 국가를 세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재위 1861-1878, 1820-1878은)는1860년 교황군을 격퇴한 후 로마와 라티움을 제외한 모든 교황의 영토를 점령하고, 1870년에 이탈리아가 교황령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 침공해 점령한다. 당시 교황 비오 9세(라틴어 Pius PP. IX; 이탈리아어 Papa Pio IX, 재위 1846-1878, 1792-1878)는 강력하게 저항한다.
이런 문제는 교황 비오 11세(라틴어 P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Pio XI; 영어 Pious XI, 재위 1922-1939, 1857-1939)에 의해 해결된다. 비오 11세는 1929년 이탈리아 당시 수상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어 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재위 1922-1943, 1883-1945) 정권과의 사이에 라테라노/라테란궁(이탈리아어 Palazzo Laterano; 영어 Lateran Palace)에서 라테라노(라테란조약; 이탈리아어 Patti Lateranensi; 라틴어 Pacta Lateranensia; 영어 The Lateran Treaty)을 체결하고, 1947년 이탈리아의 헌법에 인준되어 교황청이, 오늘의 ‘바티칸시국(市國)(라틴어 Status Civitatis Vaticanae; 이탈리아어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영어 The Vatican City)으로 자리를 잡는다. 비오 11세와 비오 12세; 라틴어 Piu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Pio XII; 영어 Pious XII, 재위 1939-1958, 1876-1958)는 나치와 협력을 뛰어넘어 36년의 독재정치를 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재위 1939-1975, 1892-1975) 총통과 역시 36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두른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재위 1932-1968, 1889-1970)수상을 지지하며, 바티칸의 재산을 지킨다.
이런 실례는 바티칸의 선교정책은 예수 그리스도 나라의 확장이라기보다는 바티칸제도와 교황의 전 세계 통치를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제34대 부통령 1945, 제33대 대통령 1945-1953, 1884-1972)년 12월 26일) 미국 대통령을 통해 천주교의 일본선교사역을 부정하신다.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원자폭탄을 싣고 혼슈(본주)의 히로시마 (広島), 규슈(九州) 나가사키(長崎: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등의 성직자들이 배출하면서 일본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어 일본의 로마라고 불림)를 향했던 미군 폭격기(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투하에 사용된 폭격기인 에놀라 게이Enola Gay와 나가사키에 팻 맨Fat Man 핵폭탄을 투하한 미국의 B-29 폭격기인 복스카Bockscar)가 티니안 섬(Tinian Island)을 날아오르기 직전에, 그곳에서 근무하던 종군 성직자들-루터파의 종군목사인 윌리엄 다우니(William Downey)와 천주교 사제인 조지 자벨카(George Benedict Zabelka, 1915-1992)는 원폭탑재 폭격기의 출격을 축복해주고, 그 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Little Boy)와 동년 8월 9일 나가사키(Fat Man)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천주교의 성지인 나가사키를 정 조준한 파일러트는 천주교신자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