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천주교 예수회가 주도한 임진왜란’(이냐시오중심)(1)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0. 4. 1. 13:12

어제 강의한 천주교 예수회가 주도한 임진왜란(1)’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국내와 일본에서 임진왜란에 관한 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그것들 가운데는 탁월한 내용이 있어, 필자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지만, 실상 임진왜란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정확하게 연구한 논문이나 저서는 거의 없다. 거의 모두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이다. 그 이유는 뻥 수준에 가까운 ()나라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의 모방에서 태어난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 1907-1978)의 장편 대하소설도쿠가와 이에야스’(한국어판 제목은 대망)가 거의 허구적인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외 학자들이 임진왜란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은 당시 인도. 중국. 일본에 온 에스파냐, 포르투갈,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사제들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이나 전후의 세계사관점에서 프랑스의 위그노전쟁과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사이의 전쟁과 네덜란드의 독립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임진왜란 전쟁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선 후에 강의하겠다.

 

임진왜란은 예수회(라틴어 Societas Jesu; 영어 The Society of Jesus)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바티칸, 교황의 권력의 확산을 위한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다. 예수회는 1517년 종교개혁과 더불어 1524년 루터교회 창설, 1534년 영국 성공회 등장으로 바티칸이 위축될까봐,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설립된 것이다.

 

산 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 San Ignacio de Loyola; 영어 St. Ignatius of Loyola, 1491-1556)1534815일 산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스페인어 San Francisco Javier; 영어 St. Francis Xavier; 方濟各방제각, 1506-1552)와 자신을 포함한 7명의 사람들(에스파냐 출신의 Ignatius of Loyola, Francis, Alfonso Salmeron, Diego Laínez, Nicolás Bobadilla, 프랑스 사부아 Savoy 출신의 Pierre Lefevre or Favre, 포르투갈 출신의 Simão Rodrigues)과 함께 청빈(poverty), 정결(chastity), 교황에 대한 순명(順命)(obedience to the Pope)을 서원하고, 영혼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파리(Paris) 북부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생 드니(현재 생 피에르 드 몽마르트르Saint Pierre de Montmartre) 소성당의 지하 묘소(in a crypt beneath the Church of Saint Denis, on the hill of Montmartre, overlooking Paris)에서의 첫 서원을 통해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인 예수회(SJ; 라틴어 Societas Iesu; 영어 The Society of Jesus)를 설립하고, 1534년 성모몽소승천축일(Assumption Day: 815) 메디치 가문출신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스 7(라틴어 Clemen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 영어 Pope Clement VII, 재위 1523-1534, 1478-1534: 교황 레오 10; 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재위 1513-1521, 1475-1521의 사촌동생)의 허락을 받아 몽마르트의 노트르담성당에서 자신을 포함한 7명의 회원으로 시작한다. 예수회가 로마교황청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자 1540년 교황 바오로 3(라틴어 Paulus PP. III; 이탈리아어 Papa Paolo III; 영어 Pope Paul III, 재위 1534-1549, 1468?-1549)가 인가한다. 이 멤버는 예수회의 수사(라틴어 Iesuitæ; 영어Jesuits)라고 부른다.

 

바오로 3세는 자신의 누이 줄리아 파르네세(Giulia Farnese, 1474-1524)를 줄리아 보다 44세 위인 교황 알렉산데르 6(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 영어 Pope Alexander VI, 재위 1492-1503, 1431-1503)의 연인이 되게 하여, 교황이 되기 전 그는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돼,‘속치마 추기경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바오로 3세는 사제로 서품받기 전 실비아 루피니라는 귀족 여인을 정부(情婦)로 삼아 슬하에 장남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이탈리아어 Pier Luigi Farnese, 1503-1547: 1534년 자신의 아버지가 교황 바오로 3세로 선출되자 피에르 루이지는 교회군 총사령관과 카스트로 공작이 된다. 어린 사내아이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행위를 했고, 1547년 살해됨), 파올로, 라누치오의 세 아들과 코스탄차라는 딸 하나 등 총 네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153466세로 교황에 올라,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15341218일 자신의 손자들을 추기경으로 서임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예수회의 선교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보다 바티칸(교황) 권력의 확장과 명예를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예수회는 조선시대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현재는 중국의 지도층과 공산당과 타협해 중국15억 인민을 나이롱 신자, 곧 형식적인 천주교신자화 하고, 대한민국을 중국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