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살인마 김정은의 조폭정권의 기원은 일제 사생아다!!!

아우구스티누스 2019. 1. 6. 07:57

이 글은 필자가 오늘 날짜(6일) 조선일보의 "[주간조선] 북한의 '갓끈 전술'과 파탄 직전 한·일 관계"라는 글에서 발췌(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매우 적절하게 요약했기 때문에 필자가 발췌했음)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구성하며 필자의 의견을 보탠 것이다.


1. 악랄한 친일파 후손인 일제사생아들이 주도한 김정은의 조폭정권


북한 정권은 한국은 친일파가 득세해 정통성이 없고 자신들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항일독립투사인 김일성이 세운 나라이니까 정통성이 있다고 말해왔다.


때문에 북한 정권은 친일파가 세운 한국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북한 정권의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김일성 정권의 초대내각과 군부 등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 16명이 친일파였다.


특히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부주석은 일제강점기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김일성 모친 강반석의 7촌인 강양욱은 일제강점기 때 도의원을 지냈다. 강양욱은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부수상 홍명희는 일제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적극 활동했다. 사법부장 장헌근은 중추원 참의 출신이었고, 북한 초대 공군사령관 이활, 북한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모두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들이었다.


반면 한국의 이승만 정권 초기 내각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낸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국방장관, 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청천 무임소장관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인사들로 구성됐다. 친일파는 한 명도 없었다.


2.  조작된 김일성의 항일운동


김일성은 “남조선(한국)은 친일 부역배들인 한민당과 이승만이 결탁하여 세운 미제의 괴뢰(傀儡)정부이므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던 자신을 구심점으로 내세워왔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들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주장해온 ‘보천보전투’ 역시 완전한 조작이다.


북한 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소속 부대를 이끌고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해 주요기관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사건을 말한다.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이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북한 교과서가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소규모 전투에 불과하다.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에서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라는 사람”이라면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이 광복 이후 북한의 공산 정권 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가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3. 소설화한 3.1혁명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였다. 소련의 지시로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온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작임을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과 평양 숭실중학교 청년학생들이 주동했다고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의 발원지도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평양의 숭덕여학교이며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성격을 3·1 인민봉기로 규정하고, 남조선의 33인 민족대표가 외세에 의존한 부르주아 상층 분자들이어서 운동 자체가 실패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 정권은 김일성이 7살의 나이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는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여덟 살의 어리신 나이에 시위대렬(대열)에 참가하시여 만세를 부르시며 보통문 앞까지 가시였다. 민족의 류혈(유혈)을 처음으로 목격하신 어리신 대원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끓어 번지시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일성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여덟 살(전통적인 우리식 계산법에 따른 나이.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출생)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고 밝혔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은 김형직과 함께 중강진에 있었다. 북한 정권이 발간한 ‘김일성 원수님의 어린 시절’이란 책을 보면 김형직이 1918년 국경지대인 중강진으로 이사했고, 이때 김일성도 함께 고향을 떠나 김형직을 도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역사를 조작하면서 스스로 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4.  백두혈통이 아니라 한라산혈통인 동시에 오사카혈통인 김정은


김정은의 모친 고영희는 1952년 6월 26일 오사카시 이쿠노구 쓰루하시에서 태어났다. 고영희의 당시 출생이름은 고희훈이고, 일본이름은 다카다 히매다. 1962년 10월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후 고영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북한당국이 '자'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여 다시 고영희로 개정했다.


고영희의 부친 고경택(1913-1999)은 제주출생으로 16세 때인 1929년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군 군복을 공급한 히로타재봉소에서 일하다가 북한으로 건너가 함경북도에 정착했다.


그래서 제주도엔 고경택의 부친 고영옥의 묘가 있지만, 고경택의 묘는 시신이 없는 '허묘'다.


5. 종합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의 살인마 김정은의 조폭정권은 악질 친일세력의 일제사생아들, 곧 일본의 노예집단에 불과하다. 살인마 정은 녀석을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일본의 노예라고 고백하는 거와 같다. 애송이 정은 녀석을 절친으로 삼은 문재인 대통령도 논리적으로보면 일제의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언하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