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국민일보“한국교회, 통일 과정서 약자인 北 더 배려해야”(추천)

아우구스티누스 2018. 6. 8. 14:03

서독과 동독은 단 한 번도 내전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할 수 있지만, 북한은 6.25전쟁이라는 근친상간을 저질렀기 때문에 독일처럼 통일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이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라는 종교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때문에 통일의 문이 열리기가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권탄압의 철권통치의 김씨 왕조체제의 사탄의 구조가 무너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양민경 기자의 보도내용을 일별해보자.

 

통독의 산증인크레첼 목사 독일 통일에서 교회 역할강연

 

극적으로 남북통일이 이뤄진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통일 독일(통독) 현장의 산증인인 베르너 크레첼(78) 목사가 7일 향후 남북통일 과정에서 있을 법한 상황과 이에 따른 교회 역할을 제시했다.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교수)과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 공동 주최로 서울 서초구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세미나 자리에서다.

 

독일 통일에서의 교회 역할을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 120여명의 청중은 공산주의 치하 동독에서 28년간 목회했고 독일개신교회(EKD) 전권대사 및 감독 등을 역임한 노목사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사회적 중재자 역할 맡은 동독 교회

 

1940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크레첼 목사는 베를린 장벽 설치가 한창이던 61년 동생과 스웨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동베를린에 있던 그의 가족 모두 스웨덴에 계속 있길 권했다. 하지만 그는 동독에도 목사가 필요하다며 동독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동독이 50년대부터 서독 목회자의 유입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레첼 목사는 당시 적지 않은 서독 신학자들이 무신론과 맞서 싸우기 위해 동독으로 찾아갔다이때 온 신학자 가운데는 현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공산주의 치하 동독교회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서독교회의 재정 지원으로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80년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인이나 평화운동가 등이 동독교회 지붕 아래 모일 수 있었다. 이는 라이프치히 월요기도회에 수만 명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동독교회는 장벽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그 이후에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장벽 붕괴 이후부터 통일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동독 사회의 안정을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동독교회는 독재자를 향한 복수극이나 약탈 등 무정부 상태에서의 혼란을 막기 위해 사회적 중재 역할에 적극 나섰다.

 

동독 붕괴 이후 과도정부 격인 원탁회의에 야당 및 공산당 지도자와 함께 목회자들이 참여한 것이 대표적 예다. 크레첼 목사는 당시 동베를린 대표로 원탁회의 진행을 맡았다. 그는 원탁회의에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이 꽤 연출됐지만 재치 있는 답변으로 분위기를 바꾸거나 주님이 주신 지혜로 문제를 풀어나갔다한국에도 통일 전 분야별 원탁회의가 마련돼 북한 사람들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약자북한의 말에 귀 기울여주길

 

통일 후 서독 정부는 동독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독 내 통신,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사정이 나아졌고 치솟던 실업률도 다소 낮아졌다. 하지만 동독과 서독 간의 경제적 불균형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