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국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의 대지진과 지진 피해 입은 기독교계의 포항 한동대학교!!!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된 백과전서파(1751년부터 1772년까지에 걸쳐서 본문 책 17권과 판화가 실린 도판 책 11권의 28권을, 1776-1777년에는 보유 5권을, 또 1780년에는 색인 2권을 간행함으로써 모두 35권의‘백과사전; 프랑스어Encyclopédie’을 편집한 프랑스의 일련의 지식인 그룹)의 한 사람으로 역사철학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 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 1694-1778)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프리드리히 대왕; 독어 Friedrich der Große; 영어 Friedrich the Great, 재위 1740-1786, 1712-1786: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치고 재판과정에서 고문을 근절한 계몽군주)와 독일 태생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Catherine II; 재위 1762-1796, 1729-1796)의 방문을 받을 정도로 당대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저서‘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 1759; 영역 Candide: or, All for the Best/Candide: or, The Optimist/Candide: or, Optimism)는 장편소설‘좁은 문’(La Porte Étroite, 1909; 영역 Strait Is the Gate) 으로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동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청교도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가 세계 문학의 최고 걸작 가운데 선정한 열권 가운데 한 권에 속한다.
이‘철학콩트’의 주요테마는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미적분법의 창시), 자연과학자, 법학자, 신학자, 언어학자(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는 물론 심지어 한자의 독해까지 가능했다는 그를 두고 후대의 학문 군주‘프리드리히 대제; 독어 Friedrich der Große; 영어 Frederick the Great;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재위 1740-1786, 1712-1786’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대학 그 자체’), 역사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신정론’(神正論; 신의론神義論; 변신론辯神論; 호신론護神論; 독어Theodizée; 프랑스어théodicée; 영어 theodicy)에 대한 비판이다.
이 철학적 풍자 소설은 1755년 당대 가톨릭신앙의 대표국가인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포르투갈어 Lisboa; 영어 Lisbon) 대지진을 다루고 있다.
1755년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All Saints’ Day; 萬聖節; 모든 성인 대축일; 저성첨례일諸聖瞻禮日; 라틴어 Sollemnitas Omnium Sanctorum; 영어 All Saints’ Day) 토요일 아침 두 번에 걸쳐 포르투갈, 에스파냐 및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강타한, 후일 지진학자들이 리히터 규모 8.5-9.0 정도로 추정하는 대지진, 세 차례의 지진해일(쓰나미tsunami)로 리스본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후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대하여; 프랑스어 Poème sur le désastre de Lisbonne; 영역 Poem on the Lisbon disaster’라는 시를 짓고‘캉디드’를 집필한다. 신앙의 도시 리스본의 파멸 때문에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회의를 가졌고, 유럽문화와 철학을 변혁시킨 참사로서 홀로코스트에 비유되어왔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과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라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대상지였다. 오히려 리스본의 대지진과 쓰나미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타국가를 식민지로 삼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제국주의 그리고 타락한 로마가톨릭의 성직자들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절망하지 않고 신앙으로 일어섰다. 포르투갈의 왕 주제 1세(Jose I, 재위 1750-1777, 1714-1777)는 제1대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주제 디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1st Marquis of Pombal, 1st Count of Oeiras, 1699-1782)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다. 폼발은 이런 비극적 사건을 이용하여 리스본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고 가옥의 배열도 이른바 폼발 양식으로 통일하여 리스본은 계몽사상을 구현한 근대도시로 변모시키며 그 중앙에는 조제 1세의 기마상을 세워 현재까지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폼발은 지진과 그 결과에 대한 질문서를 포르투갈의 모든 교구에게 보내어 근대지진과학자의 선구자가 되었다.
기독교계의 종합대학 한동대학교의 지진피해는 성서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성삼위 하느님의 경고다.
이제부터 기독교인, 특히 기독교의 지도자들과 대형교회목회자들이 참회하고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면 오히려 지진에 대한 과학적인 대처를 할 수 있음은 물론 선교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