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대한제국의 마지막 자존심, 이우의 자유와 독립정신에서 고찰한 대한민국의 뉴라이트역사관에 대한 단상(斷想)!

아우구스티누스 2016. 10. 14. 16:55

의친왕(義親王: ‘의왕, 義王’ 또는 ‘의화군, 義和君’이라고 불림) 이강(李堈, 1877-1955)은 천수를 누리며 14명의 공식적인 부인들에게서만 12남 9녀의 자손을 보았는데, 장남 이건(李鍵, 1909-1991)보다는 차남 이우(李鍝, 1912-1945)를 총애했다고 한다.

 

의친왕의 편애 때문에 이건이 조선계 일본인의 길을 걸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황실의 문헌이나 기록들을 보면 이건은 시류에 순종하는 유형이었고, 이우는 일제의 황실이나 지배층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늘 반항적이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등 조선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고하게 보여주어 의친왕이 자신의 기질, 성격과 닮은 차남에게 애정을 쏟았다고 본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이건의 생모와 이우의 생모가 다르다. 전자의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이고, 후자의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 모친이나 모친 가계의 영향 때문에, 두 사람의 기질과 성향 그리고 일본관에 대한 견해가 대조적일 수 있다.

 

그러면 이건과 이우공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이건

 

이건은 12세 때인 1921년 일제의 정략으로 인해 일본으로 보내져 일본 육군 장교(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름)가 되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22세 때인 1931년 10월 5일에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 결혼 전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1901-1989)의 외사촌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 1911- 2006: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백작 가문의 분가로, 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松平胖의 장녀이다. 이건과 혼인하기 위하여 외가의 친족인 백작 히로하시 다다미쓰廣橋眞光의 의붓여동생이 되어 히로하시 세이코廣橋誠子로 개명하였고, 이왕가의 이건과 혼인하여 이건공비 이 세이코李誠子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이름을 요시코로 되돌려서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한 남편 이건의 성에 따라 모모야마 요시코桃山佳子로 불렸다. 1951년 이혼 이후에는 생가의 성을 다시 사용하여 마쓰다이라 요시코로 개명)와 결혼하며, 1947년에 신적강하(신세키코우카臣籍降下: 일본 황족에서 평민으로 전락)로 왕공족의 신분과 일본 국적을 상실하자 일본에 귀화해 이름을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로 개명하고 1955년에 일본에 귀화한다. 장남 충(沖)은 타다히사(忠久), 차남 기(沂)는 킨야(欣也), 장녀 옥자(沃子)는 아키코(明子)로 각기 개명한다.


이건은 생계를 위해 도쿄 시부야에서 단팥죽과 산양젖을 팔거나 긴자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등 장사를 하였는데, 일본부인은 사교적인 성격이라 이 시절에 긴자의 클럽 등에서 일하면서 외도를 하자 이를 계기로 1951년 이혼한다. 차남 킨야(마에다 요시코의 아버지인 마에다 후지요시의 양자가 됨)는 이건이, 장남 타다히사와 아키코는 전처인 요시코가 키운다. 1952년 재혼한 마에다 요시코(前田美子)와의 사이에서 3남인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를 낳는다. 3남은 후일 가이세이가쿠엔(開成学園) 학교 교감을 역임한다.

 

이건은 영국제 스포츠카인 Alvis speed 20, 미국의 Pierce-Arrow의 대형 리무진 등 많은 차량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스포츠카 매니아로 유명세를 타고, 이것이 연이 되어 1970년대부터 임종 할 때 까지 일본클래식자동차클럽(CCJC)의 회장으로 재직한다.

 

일본 황족의 신분에서 평민의 강등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사회적인 불편한 대우와 교제 그리고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이혼하고 재혼 하는 등 가정사가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은 해방 후 대한민국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조선계의 일본인으로 살다갔다. 현재 대한민국 뉴라이트역사관도 이건의 길을 걷고 있다.

 

2. 이우

 

이우공은 형 이건과는 다르게 한 때 대한민국에서 얼짱 왕자, 비운의 왕자로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고, 대한제국황실가계가 주목받은 적도 있었다.

 

1917년 3월 22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 ~ 1898)의 장손 이준용([李埈鎔, 1870-191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됨)이 소실 전순혁(全順爀)에게서 얻은 서녀 이진완만이 있고, 아들 없이 사망하자 동년 3월 23일에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1852-1919)의 뜻에 따라, 그리고 동년 5월 28일에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천황(대정천황大正天皇, 1879-1926)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되자, 이우는 당숙(堂叔: 아버지의 사촌 형제로 오촌이 되는 관계)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된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공(公: 공작과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5등급의 봉작제인 오등작五等爵의 일종인 일본 화족과 조선귀족의 공작보다 높은 지위로 황족에 준하는 예우이다. 대한제국의 직계는 왕족으로, 방계를 공족으로 분류하였음)의 지위를 계승하여‘이우공 전하(殿下)’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 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일제가 대한제국황실족을 통제할 목적으로 제정한 규례) 제59조의 왕, 왕세자, 왕세손, 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강제의무에 따라 이우공은 일제 육군사관학교와 일제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중령)에 이른다. 이우는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운현궁에 버티며 전역을 신청한다. 그러는 동시에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이때 지인들에게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조선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걱정하면서 이제 일본 군복을 빨리 벗고 싶다고 고백한다.

 

1945년 6월 일본 육군 중좌로 진급해 일본 본토 히로시마(광도廣島)로 전출을 명받고 8월6일 말을 타고 출근하던 중,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다음날 8월 7일 히로시마 시 니노시마 해군병원에서 33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8월 13일에 대좌(대령)진급과 함께 공3급 금치훈장을 추서한다. 장례는 (소화천황昭和天皇, 본명은 히로히토裕仁, 재위 1926-1989, 1901-1989)이 항복방송을 한 지 5시간 후인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서울운동장에서 육군장으로 엄수된다.

 

그런 후 매우 애석하게도 반일정신이 투철한 이우공은 1959년 10월 17일에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靖國神社)에 합사하는 영새봉안제(靈璽奉安祭)가 거행되어 일본신으로 부활한다. 사망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는 영새부(靈璽簿: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명부)를 야스쿠니 신사의 어신체(御神體·신령이 머무르는 장소. 신사에 따라 거울, 칼, 구슬, 돌, 나무 등 다양하다)가 있는 본전에 놓으면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이 어신체에 깃들어 신령이 된다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적인 입장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출신의 군인이나 평민은 일본인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일본을 위해 죽었다면 당연히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는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며 사망한 일본 황족을 따로 분리하여 합사하였는데, 이우공을 일반 군인과 같은 수준으로 합사하여 대한민국을 엿 먹인다.

 

대한제국의 황실가족들은 일본황실을 관리하는 궁내부가 철저하게 직접 관리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우공의 부친 의친왕은 구체적으로 독립운동활동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21세기 대한민국은 이우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이우공의 부친 의친왕의 언행과 독립활동을 이우공의 업적으로 회자(膾炙)할 정도로 이우공의 자유와 독립정신을 매우 애절하게 그리워한다.

 

다음과 같은 실례는 일제에 대한 이우공의 고귀한 저항정신을 보여준다.

 

(1) 조선인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

 

일본 황족 또는 화족과의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친왕의 지원과 조선왕조 제 25대 왕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1831-1863)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의 부군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로비활동, 곧 귀족원 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책과 인맥을 활용하여 일본의 추밀원, 귀족원, 궁내성에 공작을 벌여 1935년 4월 17일에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텐노의 칙허가 발표되자 이우공은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朴日緖)의 딸 , 곧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朴贊珠, 1914-1995)와 1935년에 결혼한다.

 

박찬주는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설립자이자 사립학교인 추계학원의 초대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다(1938년경에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 황신덕에게 소유 건물을 희사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 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을 도움).

 

당시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의 궁내성규정인 ‘왕공가궤범’을 무시하고 조선황실이 조선백성과 결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영친왕(英親王, 본명 이은李垠, 1897-1970),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도 일본황족이나 화족(귀족)과의 강제적인 결혼을 비켜나가지 못했는데, 이우공은 그런 불가능한 일을 깨뜨렸다는 것은 조선백성의 자유와 독립정신이 없으면 성취할 수 없는 줏대 있는 행위로 간주한다.

 

(2) 이방자의 증언

 

영친왕비 이방자는 이우공의 배일(排日)정신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 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

 

(3) 대한제국황실내의 일본인 증언

 

1)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이우공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

 

2)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은 이우공을 형 이건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인다.”

 

3)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이우공의 투철한 반일의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이우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

 

4)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다케히코는 훗날 히로시마 지역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우공의 조선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증언한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슨 일에서든 일본인을 앞서려고 노력했고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4) 대한민국의 대통령보다 대한제국의 황제를 희망했던 우남 이승만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재위 1948-1960, 1875-1965)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기를 소원하며 옥쇄를 소유하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뉴미디어상에 글을 올렸기 때문에 참고하기 바란다.

 

다음과 같은 예화는 우남의 조선왕에 대한 욕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남 정부시절, 고종 직계(순종·의친왕·영친왕) 왕족의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지만, 이우공 사후에 부인 박찬주의 집요한 노력으로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판명되어 장남 이청(李淸, 1936-) 명의로 사유화 된다.

 

조선왕조의 왕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우남은 운현궁을 경무대로 쓰지 못하는 게 아쉽다며 그 대가로 이우공의 장남 이청 또는 차남 이종(李淙, 1940-1966: 미국 브라운대 유학 중 1966년 12월 25일 교통사고로 사망)을 양자로 달라고 운현궁측에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명목상 우남이 양녕대군의 17대 손으로 적통 왕가의 후손이 양녕대군 후손의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거부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실은 자신들을 쪽박 차게 한 우남은 물론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도 쌍것으로 여길 만큼 극단적으로 증오한다.

 

3. 나가는 말

 

이우공은 부친 의친왕처럼 독립운동을 한 구체적인 사례는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반일정신을 비롯해 조국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며 칭송하는 뉴라이트역사관을 단죄한다.

 

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pportEmptyPar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