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오키나와전투에서 고찰한 대한민국의 뉴라이트역사관에 대한 단상(斷想)!

아우구스티누스 2016. 9. 8. 12:53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1904)과 독일 지리학자이자 지정학자(地政學者)인 카를 하우스호퍼(Karl Ernst Haushofer, 1869-1946) 등의 영향으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독일 민족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생활권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게르만족의 ‘생활공간’(생활권; 독어 Lebensraum; 영어 living space)을 나치당의 정책에 도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고, 일본은 독일의 ‘생활공간’을 기초하여 1940년대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론을 전개하며 침략을 합리화한다.

 

사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멕시코를 침략한 논리였던 ‘명백한 운명론’(the ideology of Manifest Destiny, 1845)에서 기인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대동아공영권’은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의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배태된 것이다. 이 사상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1890년 아시아 최초의 의회를 개설한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89-1891 제3대 총리, 1898-1900 제9대 총리, 1838-1922)수상은 의회연설에서 오스트리아 법학자의 이론을 원용해 ‘주권선’과 ‘이익선’ 수호를 천명하고, 이것이 일본의 국방외교정책으로 자리 잡는다.

 

‘주권선’은 일본열도를 의미하고, ‘이익선’은 일본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계선인 한반도를 의미한다.

 

일본이 자신의 주권선을 수호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일방적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폭탄투하다. 두 지역의 원폭 ‘버섯’구름은 일본으로 하여금 최첨단우주산업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여, 미국과 철저한 협조로 이 분야에선 미국과 동등한 수준이다.

 

19세기 일본은 세계최강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다툼에서 영국에 찰싹 붙어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부동항의 확보하는 차원에서 한반도를 점령하면 그 다음엔 일본열도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일본을 보호하려면 한반도가 러시아의 수중에서 들어가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미영은 러일전쟁으로 두 나라를 탈진케 하여 러일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로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과 러일전쟁(1904-1905)을 수행해 승리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위에서 보듯이 당시 러일전쟁시의 러시아는 1917년 이전의 러시아이고, 러시아가 비록 1917년부터 공산화되지만, 한반도의 6.25전쟁 이전 까진 공산주의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맹주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일본을 통해 관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련 없는 러시아를 한반도를 빨갱이러시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반도를 씹어 먹었다고 소설화하는 것이 일본역사이고, 이것에 맞장구치는 인간들이 악질친일세력과 일제사생아의 후손들과 뉴라이트역사관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면 오키나와전투에서 뉴라이트역사관을 비판 해보자.

 

일본의 ‘이익선’을 이용한 ‘주권선’지키기는 이미 한반도를 먹어치우고 난 뒤 태평양전쟁 때 정점을 이룬다. 그것은 일본열도를 위해 한 때 중국과 대만, 조선과 일본본토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독립된 류큐(琉球)왕국인 오키나와(1879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강제로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고, 당시 미 태평양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중국을 견제하는 ‘천연 방어진’이라고 평가하며 27년간의 미군정통치를 거치고, 1972년 다시 일본이 돈으로 오키나와를 사와 일본영토로 편입시킴)에서 벌어진 미일전쟁(1945년 4월 1일-6월)이다.

 

지금부터 필자는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가 집필한‘쇼와 육군’을 기초하여 재구성한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본도의 중서부해안에 상륙하자, 일제는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전력화한다면 적전으로 보낸다.

 

당시 일제수뇌부는 일본본토방위를 위해서 오키나와를 ‘버리는 돌’로 삼고 오키나와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대한 지구작전을 감행한다.

 

“오키나와는 100%희생 시켜도 괜찮다”

 

사실 당시 일제의 군국주의는 전체주의라 일제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하늘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고, 일본국민은 보통 인간 아니면 동물이고, 타국가의 국민은 동물수준도 안되는 마음대로 처분하는 물건이라고 보았다.


미일간의 전투인 아시아의 하와이 오키나와전투에서 공식통계로 오키나와현민 15만 명이 죽었고, 미군전사자는 1만 4천명, 일본군 전사자는 7만 7천명이라고 한다.

 

오키나와현민들 대부분이 군 비행장과 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탓에, 군사시설의 위치를 알고 있어, 이들이 미군의 포로로 잡히면 군사기밀을 누설한다는 구실로 또는 군식량을 축낸다는 빌미로 일제는 이 주민들을 미군의 스파이로 몰아 학살하거나 총칼로 위협하여 자살을 강요해, 동굴 안에서 일본군이 건네준 수류탄을 터트리거나 농약 같은 극약을 먹고 죽은 주민들이 수천여명이나 되고, 물품부족으로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또는 친구끼리 맨손 또는 흉기(칼이나 몽둥이, 농기 등)를 써서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연출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방위부대가 궤멸됐고, 군문서도 모두 소각되었지만, 미군기록은 존재하는데, 일본은 공식문서가 아니라고 이를 거부하고 오키나와전투를 왜곡한다. 이것이 중국과 일본이 동이민족의 한반도 상고사를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들의 국익에 맞게 소설화한 상고사를 대한민국역사학자들에게 실증사관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거짓 상고사를 참조하도록 하는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관을 따르는 대한민국의 노예유형의 학자들과는 다르다.

 

오키나와전투의 왜곡역사 가운데 두 가지만 들겠다.

 

1.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자료관에 전시된 일본군 마네킹의 이미지조작

 

첫째, 자료관 건립 초기 일본 본토와는 대립적인 오키나와현지사가 재직 중일 땐 일본군의 총부리가 동굴 속에 피란 중인 가족들에게 향하게 하는 일본군의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었다.

 

둘째, 건립도중 우익성향을 가진 지사가 당선된 뒤 일본군의 총은 위로 향하게 만들어 가족들을 위협하는 의미는 없어지고 오히려 가족들을 보호하는 인상을 주도록 왜곡된 모습으로 바뀐다.

 

2. ‘히메유리 학도병’에 관한 이미지 조작

 

학도병으로 오키나와전에 동원된 130여명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여고생이 일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원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식의 이른바 ‘순국미담(殉國美談)’으로 미화하는 상당수의 소설과 영화가 등장한다.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휩쓸려 희생된 여고생들이 미군의 항복 권유를 ‘의연히’ 거부하고 비장하게 절벽으로 일제히 몸을 던져 산화했다는 식으로 완전히 조작한다.

 

1968년도 제작된 일본영화‘아아 히메유리의 탑’은 절벽위에 선 두 여학생. 한 명이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둘은 서로 껴안고 산화하는 것으로 끝난다.

 

일본은 이처럼‘히메유리 학도병’에 대한 이미지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주변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한 사실보다는 전쟁의 ‘피해자’임을 내세우는 일본의 ‘피해’ 담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런 소설화된 이미지 조작과 함께 미군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 투여는 일본 전체가 ‘피해자’임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짜깁기한 상고사나 일제강점기역사를 근거하여 일본이익을 대변하는 추잡스런 한국인들이 즐비하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악질 친일세력과 일제사생아와 그 후손들과 달리 오키나와 현민은 오키나와전투에 대한 왜곡 음모에 대해 필사적으로 맞서 반발하며 저항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1. 1976년 황태자 부부(현재 천황 부부)가 히메유리의 탑을 찾아가 헌화를 할 때 오키나와현민 두 사람이이 굴속에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봐 화염병을 투척했는데, 이것은 오키나와현과 오키나오현민은 일본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2. 미군의 보도반원이 촬영한 사진, ‘작은 나뭇가지에 하얀 천을 매달고 미군 앞으로 걸어오는 대 여섯 살짜리 소녀’(하얀 깃발을 든 소녀)

 

첫째, 1985년 8월 출판한 동화 ‘류코의 하얀 깃발’


류코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고 혼자서 도망 다니다가 동굴에 몸을 감춘다. 항복을 권고하는 미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동굴에 있던 일본군 병사가 류코의 손에 하얀 깃발을 쥐어주어 밖으로 내보낸다. 미국이 정말로 총을 쏘지 않을지를 시험한 것이다.

 

류코는 웃으면서 나온다. 미군을 총을 쏘지 않는다. 그러자 일본군 병사가 안도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고 뒤따라 나온다.

 

둘째, 후에 ‘류코’가 아니라 ‘히카 도요코’로 밝혀짐

 

첫째 이야기가 소설화된 것이라면 실제 상황은 이렇다. 당시 7세의 히카 도요코가 어떤 동굴에서 눈 먼 노인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지내다가 그 노인이 미군의 항복권고방송을 듣고 나뭇가지 끝에 하얀 훈도시(일본의 성인 남성이 입는 전통 속옷으로, 면 재질로 되어 있음)를 삼각으로 잘라내서 묶고는 ‘너는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셋째, 오키나와전투 당시 일본 주둔군의 장교와 유가족이 지난 2005년 노벨상(1994)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 1935-)가 오키나와전투에서 집단자살강요를 사실로 기술한 저작에 대한 출판금지 청구소송사건인‘오에 겐자부로 소송’

 

넷째, 지난 90년대 일본 슈퍼스타중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아무로 나미에를 필두로 영화‘링’과 드라마 ‘고쿠센’으로 유명한 나카마 유키에, 영화‘스윙걸스’의 마에하라 에리, 그룹 스피도와 오렌지 레인지 등 수많은 가수와 탤런트, 모델 등이 오키나와 출신인데, 1990년대 텐노가 초청한 피로연에 참석했던 아무로 나미에는 텐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전쟁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를 존중하거나 찬양하는 것 자체가 고향 오키나와에 대한 모독이라는 인식에서 '기미가요(君が代: 텐노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음

 

다섯째, 일장기인 ‘히노마루’를 불태우거나 하수구에 처박음으로서 오키나와현과 현민은 일본과 일본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이미지를 심음


오키나와는 면적으로 일본의 0.6%에 불과하지만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고, 부녀자와 여학생에 대한 미군의 성폭행사건, 전투기 또는 수송기의 이착륙과 각종 훈련으로 인한 소음과 폭음 등은 주민들의 생활에 큰 지장과 고통을 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오키나와는 일본이 감추고 싶은 모순과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라 일본 본토로부터 끊임없이 고통과 희생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계속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오키나와현민은 주체적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오키나와전투의 본질과 성격을 고스란히 밝힘으로써 오키나와현과 현민은 더 이상 일본과 일본인이 아님을 세계에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고위 간부였다”,“나는 친일파”,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라고 고급 공무원이 나팔 불고 다녀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 악질 친일세력과 일제 사생아 후손들이 땅 소송을 해도 대한민국국민은 전혀 꿈쩍하지 않고 있다.


종국엔“독도는 일본 땅일 수 있다”, “위안부는 돈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매춘부다”,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의 시혜” 등의 담론을 언론과 방송국 등에서 공개적으로 씹어대도 뉴라이트역사관을 지닌 자들은 오늘도 평안히 잘 지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키나와전투의 본질과 성격을 오키나오현민은 주체적이며 주인정신으로 바라본다면, 대한민국의 뉴라이트역사관의 소유자들은 일제강점기를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뉴라이트역사의 역사관은 구소련이나 북한의 전체주의를 옹호하던 빨갱이였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변신변절한 올드 보이들이 중심되어 형성된 사상이라, 자연스럽게 3.15, 5.16, 1212의‘독재문화’, ‘헌정유린과 법질서파괴문화’, ‘조폭문화’, ‘깡패문화’, ‘오입문화’, ‘기생관광문화’,‘지역차별문화’, ‘한탕주의문화’, ‘일방적 명령하달식문화’, ‘획일주의적 전체주의문화’,‘악질일제찬양문화’, 수많은 고문피해자, 간첩조작피해자, 산재사망자, 산재피해자 등을 죽이거나 장애인으로 만든식의 ‘대한민국의 근대화’ 등의 생명경시의‘사탄의 문화’를 대한민국현대사의 주류문화로 선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문화를 펼치는 자들의 통치를 비판하시고 생명의 문화를 담당한 빛의 자녀들이 실행해야 할 정치철학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십자가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25.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26.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28.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셨다.”(공동번역. 마태복음 20:25-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탄의 정체를 당신의 생명의 문화, 빛의 문화와 비교하시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44.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공동번역. 요한복음 8:44)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개역한글. 요한복음 10:10)


“12.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공동번역. 요한복음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