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獨 '괴물 암호' 풀어내… U보트 궤멸·노르망디 상륙의 '1등 공신'”(추천)
앨런 튜링(Alan Turing| Alan Mathison Turing)은 조국 영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현대 컴퓨터공학에 초석을 놓았지만, 동성애 때문에 성문란 혐의로 고소당했고, 법원에서 다량의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먹는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았다.
튜링은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1954년 6월 7일 42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사과에다 독약(청산가리)을 주사한 뒤 동화 속의 백설공주처럼 사과를 깨물고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애플사의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로고는 튜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즐비할 정도다.
그러면 조국영국을 구하고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컴퓨터의 시조,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이자 논리학자인 튜링에 대해 살펴보자,
[영화로 화제… 2차대전 終戰 앞당긴 英 천재수학자 튜링]
난공불락 암호 獨 '이니그마' - 매일 변환, 24시간內 풀어야陸海空軍, 잇따라 군용 특화… 연합군 허 찌르는 작전 펼쳐
튜링, 암호 해독기 직접 제작 - 숱한 시행착오끝 암호 풀어獨 해군의 작전 정보 포착, 학계 "1400만명 목숨 구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은 '이미테이션 게임'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개봉 2주 만에 12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국 TV 드라마 '셜록'의 셜록 홈스 역으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연기파 배우들의 호연에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사진〉의 비극적 삶과 2차대전 암호 해독 작전 등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감이 어우러진 '볼 만한 영화'란 평을 받고 있다. 과학 저술가 앤드루 호지스가 쓴 동명(同名)의 앨런 튜링 전기가 원작이다.
이 영화를 통해 화제가 된 것은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이 '이니그마(enigma·수수께끼)'라는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수행했던 비밀 작전이다. 이 암호 해독의 일등 공신이 영화 주인공이자 천재 수학자인 앨런 튜링이다. 그는 18세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고, 24세에 컴퓨터의 이론적 원형에 해당하는 가상(假想)의 연산 기계를 구상했던 천재였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1938년 영국 정부가 버킹엄셔의 소도시 블레츨리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암호해독본부에 채용됐다. 그가 직접 설계·제작한 암호 해독기 '봄베'가 1940년 독일군의 일기예보에서 힌트를 얻어 해독의 결정적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영화에서는 튜링이 해독기를 '봄베' 대신 학창 시절 단짝인 '크리스토퍼'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려진다. 결핵으로 요절한 실존 인물인 크리스토퍼는 영화처럼 실제로도 왕따와 괴롭힘에 시달리던 튜링을 지켜주는 단짝 친구이면서 동성애자인 튜링이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는 '첫사랑'이었다.
이니그마 해독 작전에 대해서 영국 정보부 전사(戰史) 편찬진 등 학계에서는 "종전을 최소 2년 앞당겼으며 1400여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차대전의 최대 분수령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발판이 이 암호 해독을 통해 마련됐다는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2차 대전 초기 연합군 전세는 위태로웠다. 서유럽 곳곳에서 공중 폭격을 퍼붓고 지상전을 전개하며 연합군을 옥죄었다. 그중에서도 위세를 떨쳤던 것이 기동력이 뛰어난 U보트(잠수함)를 앞세운 해군이었다. 영국의 항공모함 글로리어스호가 독일의 순양함 샤른호르스트호에 격침되는 등 초기 연합군의 전력 손실이 이어지며 대서양 제해권이 독일에 넘어갔다. 특히 독일 해군은 연합군 전함뿐 아니라 물자를 싣고 미국에서 오는 보급선까지 격침시키며 연합군을 전력 약화와 물자난이라는 이중고로 내몰았다.
독일 공세의 원동력이 해독 불가해한 암호 체계인 '이니그마'였다. 영국은 도청 인력을 총동원해 이를 습득하고도 풀지 못하며 고전했다. '이니그마 머신'이라고 불리는 암호 생성기 장착 회전자가 매일 바뀌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해독해내지 못한다면 어렵게 알아낸 적의 암호는 모두 휴지조각이 됐던 것이다.
이 흐름을 바꾼 주역이 튜링이다. 그가 만든 암호 해독기 '봄베'가 숱한 시행착오 끝에 1940년부터 본격적으로 암호를 풀기 시작하면서 독일 해군의 작전 메시지를 포착·해독하는 횟수가 늘었다. '3월 1일 8시 00분 2지점에서 U69와 U107 호송 예정' '영국 선박 AM4538 지점서 표류 중' 등의 핵심 정보가 잡혔다.
독일은 1943년 5월에만 U보트 전력의 5분의 1인 40척이 격침되는 등 궤멸 직전으로 내몰렸다. 그해 말엔 U보트의 위치를 독일군보다 영국군이 더 빨리 파악할 정도로 기술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15만여 연합군 병력이 동원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였던 '해상로'가 확보된 것이다.
튜링의 주도로 수집된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 말해주는 역설적 상황까지 벌어졌다. 영국 해군이 독일 군함과 보급선을 잇따라 침몰시키며 승승장구하자 '독일이 눈치 채 암호 체계를 더욱 복잡하게 바꾸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내부에서 제기된 것이다.
이 부분은 영화와 원작 책에서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다. 우선 영화에선 '봄베'가 해독한 암호를 통해 튜링의 팀 동료의 친형이 탑승한 영국 전함이 U보트의 기습 공격에 노출된 정황이 포착된다. 팀의 책임자인 튜링은 "저 배를 도주시켜 형을 살려달라"는 동료의 애원을 거절하며 괴로워한다. 피격 목표가 갑자기 이동할 경우 암호 해독 사실이 들통 날 수 있어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원작 책에 없다.
반면 책에는 '잇단 보급선의 피격으로 독일 당국이 원인 조사에 나섰지만, 이니그마 암호가 해독될 가능성은 제외됐다'는 내용이 있다. 독일은 영국군이 자국 배를 잇따라 격침시킨 원인을 이중첩자 등 내부자 소행으로 간주했을 뿐 실제 자신들의 암호가 적에게 읽힐 것이라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영화에 없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