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조선왕조의 조공의 실상!

아우구스티누스 2014. 11. 7. 10:49

조선과 중국명나라와의 조공(朝貢)관계는 21세기의 유엔처럼, 국제기구관점에서 고찰해야지, 식민지사관처럼 조선이 중국명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상납하거나 중국명나라도 무조건 조선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조공에 준하는 답례(시여'施輿':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바치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은 월남처럼 3년에 1번만 바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를 해야했기 때문에, 조선이 중국에게 복종하거나 중국의 속국 또는 사대주의징표가 아니라 물물교환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관계를 통한 선진문물의 교류와 정치적 경제적 실리추구라고 보면 된다. 조선왕조시대엔 관무역(官貿易)만 허용되었고,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은 금지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다. '조공무역(朝貢貿易)=관무역(官貿易)=공무역(公貿易)'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미국의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son Grant, 1822-1885, 미국남북전쟁 때의 북군 총사령관, 대통령 재임기간 1869-1877)에게 류큐(琉球: 에도막부는 1609년 류큐를 침략했고, 메이지정부는 1879년 아예 류큐를 멸망시키고 동년 4월 4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시킴) 병합의 정당성을 극력 해명한 다음과 같은 담론도 조공이 무역형식의 일종이라고 대변한다.

“류큐는 삼백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었다. 류큐의 작은 섬들은 본래 일본 영역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류큐가 이전에 청에 조공을 바친 것은 류큐와 중국 간의 무역 형식의 일종일 뿐이지 종주국과 속국관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중국무역의 가장 밀접한 이너서클(inner circle)엔 조선(매년3공), 류큐(격년1공), 월남(3년1공)이 들어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배제당해, 일본은 동아시아외교의 아웃사이더, 왕따였다. 당시 일본은 해적의 본거지라고 여겨 '왜구'(倭寇) , 동북아시아국제질서나 외교의례관점에서 일본은 부적절한 지역이라고 해서 '일역'(日域)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본은 왜구를 주로 ‘민간무역업자’라고 미화하여 부르며, 류큐를 통한 중개무역, 네덜란드와의 교역 등으로 무역수요를 충당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며 자기들은 조선과는 달리 중국과는 조공관계를 맺지 않는 주권국가라고 쌩구라를 구미열강에게 선전하는데 성공하여, 어처구니 없게도 조선은 일제의 시다바리국가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