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6일) 강의한 ‘반미주의의 기원은 바티칸이다(2)’을 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이번 강의는 영국 성공회탄생의 배경과 북아일랜드의 기독교화에 대한 것이다.
헨리 7세(Henry VII, 재위 1485-1509, 1457-1509)는 장남 아서 튜더(Arthur Tudor, 웨일즈의 공公Prince of Wales, 1486-1502)가 3세 때인 1489년부터 결혼준비를 착수하면서 11세인 1497년 새로이 통일된 에스파냐 왕국의 국왕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스페인어 Fernando II de Aragón; 영어 Ferdinand II of Aragon, 1452-1516)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스페인어Isabel I de Castilla; 영어Isabella I of Castile, 1451-1504)의 1남 4녀 중 막내딸로 아서보다 1살 위인 12세의 아라곤의 캐서린(라틴어 Katerina; 스페인어 Catalina; 이탈리아어 Caterina; 독어 Katharina; 프랑스어 Catherine; 영어 Catherine 또는 Katherine, 1485–1536/이름은 순교자 알렉산드리아의 캐서린 또는 순결한pure의 그리스어 καθαρός katharos에서 유래)과 약혼을 하게하고, 아서는 15세 때인 1501년 16세의 캐서린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것은 영국과 에스파냐 왕국이 친선관계를 맺어 프랑스의 견제의 목적과 신부의 지참금 챙기기다.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아서는 신부인 캐서린을 사랑하였으나, 그만 결혼한 지 6개월 후인 1502년 4월 2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캐서린은 두 사람이 신방을 차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가운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보다 8년 연하인 헨리 8세(Henry VIII, 1509-1547, 1491-1547)는 형수와 결혼하지만, 끝내 왕자를 얻지 못하고, 훗날 메리 1세(Mary I, Bloody Mary, 피의 메리, 재위 1553-1558, 1516-1558)가 될 딸 하나를 얻자, 형수의 시녀인, 자신보다 16세 연하의 앤 불린(Anne Boleyn, 재위 1533-1536, 1501-1536. 원래는 Bullen이었는데 앤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Boleyn으로 표기하면서부터 혼용. 잉글랜드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토머스 볼레인Thomas Boleyn, 1477-1539와 잉글랜드의 귀족인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Boleyn, 1480-1538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헨리 8세의 제4계비인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 재위 1540-1542, 와1523-1542는 외사촌 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수업을 받으며 예법을 닦았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했다.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XII, 재위 1498-1515, 1462-1515의 왕비이자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Mary Tudor, 1496-1533의 시녀가 되었다가 루이 12세가 승하하고, 루이 12세의 사촌 샤를 아들 프랑수아 1세Franςois I, 재위 1515-1547, 1494-1547이 즉위하자 그의 정비 클로드 드 프랑스Claude de France, 재위 1515-1524, 1499-1524의 시녀로 간택되어, 당시 유럽 유행의 최첨단을 걸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받은 교육 덕분에 세련된 기품이 배어 있었으며 화술도 뛰어났음)과 연애하며, 루터보다 8년 연상인 교황 레오 10세(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재위 1513-1521, 1475-1521)의 사촌동생 교황 클레멘스 7세(라틴어 Clemen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 영어 Clement VII, 재위 1523-1534, 1478-1534)에게 형수와의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신앙과 동시에 나라(튜더 왕조)를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헨리는 튜더 왕조의 왕에 불과하지만,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 5세(독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이탈리아어 Carlo V; 스페인어 Carlos I; 프랑스어, 영어 Charles V, 1500-1558)는 신성로마제국황제(1519-1556, 1500-1558)이자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1516-1556)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언한다.
이것은 또한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 5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어서 결혼 무효화를 거절한 클레멘스 7세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사실 헨리8세는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 (라틴어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 1521; 영어 Defense of the Seven Sacraments)를 저술한 공로로 1521년 10월 11일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틴어 Defensor Fidei; 영어 Defender of the Faith: 헨리 8세의 파문 후 1544년 잉글랜드 의회가 카톨릭 신앙의 수호자 메리 1세를 제외하고, 헨리 8세와 그의 후계자에게 ‘영국성공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수여함)라는 직함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헨리 8세는 신앙과 국가(후계자)를 위해 결단을 내린다.
헨리 8세는 앤과 연애하고, 1532년 12월에 앤이 임신하자,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동년 6월 1일 앤은 잉글랜드의 왕비(1533-1536)로 즉위한다. 캔터베리 대주교(1533년 3월 30일에 즉위)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1533년 5월 23일에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신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헨리 8세와 앤과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라는 종교적 선언을 한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크랜머를 파문하고, 그의 대주교직을 박탈한다. 물론 영국과의 외교 관계도 단절된다.
그래서 헨리 8세는 두 가지를 실행한다.
1. 1534년 11월 영국 국교회(國敎會)를 설립하는 ‘수장령’(首長令; Supreme Act, Acts of Supremacy)을 선포해, 잉글랜드 국교회(國敎會)를 만들고 스스로 그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이것이 성공회(聖公會; 라틴어 Ecclesia Anglicana; 영어 The Anglican Domain or Church, The Church of England/미국 성공회 The Episcopal Church)의 탄생이다.
성공회는 중도(via media; middle way)의 길을 걷는다고 선언하지만, 이런 종교정책은 21세기의 신학사상을 대변한다. 성공회엔 세 부류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고교회(High Church): 로마 카톨릭식의 미사 중심의 예배를 선호하는 부류(Anglo Catholic Party)
(2) 저교회(Low Church): 프로테스탄의 복음주의를 선호하는 부류(Evangelical Party)
(3) 광교회(Broad Church): 진보주의자들(Liberals)
헨리 8세는 1536, 1539년에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교회재산을 몰수하며 국가재산을 지킨다.
2. 헨리 8세는 1534년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구어의 얼스터Ulster: 영국혁명시대1640-1660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으나, 윌리엄 3세의 정복으로 영국국교회체제가 확립되었다. 벨파스트Belfast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이자 항구 도시)에 성공회신자 스코틀랜드 15만 명, 잉글랜드 2만 명의 대량이주정책을 착수한다. 제임스 1세(James I, 영국 왕 재위 1603-1625, 1566-1625; James VI, 스코틀랜드 왕 재위 1567-1625)도 1606년부터 가톨릭의 아일랜드를 무릎 꿇리기 위해 북아일랜드로 잉글랜드인을 이주시킨다. 이들은 ‘스카치 아이리시’(Scots Irish)라고 불린다.
이런 정책은 영국성공회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정책이다.
헨리 8세의 영국성공회 설립은 바티칸의 성직제도와 제7성례전에 대한 그릇된 구원관을 거부하고, 기독교인 개개인의 신앙에 기반 한 구원관을 제시한 것이고, 이것은 또한 바티칸의 전체주의, 독재주의, 전제주의에 기초한 무정부주의를 고발하며, 자유민주주의와 가정과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확장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헨리8세와 제임스1세가 북아일랜드에 영국성공회 신자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자의 정착지를 결성한 것은 천주교 아일랜드인을 바티칸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는 사랑의 확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바티칸은 절망하며, 반미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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