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무라이(さむらい)의 ‘칼’ 문화의 허상과 실상
일본 사상 최대인 9.0 규모의 대지진과 10여m 높이의 대규모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누출로 일본열도가 지옥의 체험을 하고 있다. 한반도의 모든 매스컴은 50명의 사무라이후예들이 원자력발전소방사선 피폭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 걸고 지킨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다 무지와 무식의 소치다. 도쿄직원 5백 명 가운데 50명이 남아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고, 사장까지 행방이 묘연한데, 왜 한반도는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일본인들의 사무라이기질을 찬양하는가?
일본인은 연역법에 입각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연구하는 족속이 아니다. 항상 일이 끝난 후 그 결과물을 아름다우며 창조적이고 구미선진국의 문화에 버금가는 것임을 내보이기 위해서 그 과정을 철저하게 날조(捏造 fabrication)한다. 귀납법에 의해 가공된 것이 일본역사와 문화다. 한마디로 일본의 모든 것은 뻥이다. 고상한 학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일본의 실상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가공된 시뮬라크르(Simulacre), '하이퍼리앨리티'(hyper-reality)다.
올 3.11일 대지진, 쓰나미, 원전사태로 일본이 몰락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에 대한 매뉴얼이 없으니까 모든 시스템이 정지되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정부에 저항하지 못하는 노예형 일본인을 보며 신기하며 답답했을 것이다. 혹자는 그 허상을 보고 일본인들이 무섭다고 한다. 다 구라에 속고 있다. MB정부는 저항력이 강한 주인형인 한국인을 일본인처럼 노예형인간으로 만들려고 일본인의 쪼다 같은 성격을 선진형인간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언론을 통해서 한국인에게 세뇌시키는데, 그것은 대실수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 1894-1895)에서 승리하자 아시아의 패권국가 중국청나라를 밀어내고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꿰차며 자신감을 갖고 러일전쟁(露日戰爭 Russo-Japanese Wars 1904-1905)을 준비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성을 미화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사무라이(ぶ-し, 武士)의 집안에서 태어난 니토베 이나조(にとべいなぞう, 新渡戶稻造, Nitobe Inazo)는 에도시대(江戸時代)또는 도쿠가와시대(徳川時代)의 사무라이(ぶ-し, 武士)문화를 급조한다.
니토베는 미국과 독일에서 수학했고, 미국 여성 메리와 결혼했으며, 국제연맹초대사무차장을 지낸 근대일본의 국제적 지식인이다. 그는 미국인 아내가 자신에게 일본의 도덕교육과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지만 답변이 궁색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일이 생긴다. 어느 날 벨기에의 저명한 법학자 라블레가 그에게 묻는다. “일본에서는 종교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학교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도덕교육을 합니까?” 이 물음 또한 그에겐 수수께끼이다.
일본에 한반도의 조선왕조처럼 성리학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대사는 백제의 역사고, 중세근대사는 나라꼴을 갖추지 않아서 역사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음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1899년 미국에서 서양의 기사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조선성리학을 모방한 사무라이(さむらい) 정신을 버무려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로‘일본의 영혼, 부시도(武士道)’(BUSHIDO: The Soul of Japan)라는 책을 집필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판한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도 베게머리에 두며 자기 전에 매일 읽었다고 할 정도로 이 책은 나오자마자 구미선진국에서 대 베스트셀러가 된다. 서양에서 유명해지자 곧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일본에 역수입된다. 특히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재임기간 1901-1909)는 이 책을 애독하며 침이 마르게 찬양하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그는 니토베와 절친한 인간관계를 맺고, 일본의 조선강탈이 정당하다고 공언한다. 니토베는 1905년 미국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의 중재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체결하게 되었을 때 일본에 유리하도록 조정한다.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いとうひろぶみ, 伊藤博文)의 심복, 귀족원 의원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가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의 하버드 동창생이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에는 비극의 씨앗이다.
이처럼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때부터 미국의 친일반한 캠페인은 시작된다. 미국은 세계를 다스리는 패권국가다. 미국의 정책노선에 부합하면 세계화고 반대하면 반미다. 그런데 그 세계화노선이 일본에겐 행복이지만 한반도에겐 불행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전의 제국주의침략정책을 미화시키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와 구 러시아의 공산주의라는 대결구도로 세계를 이끈다는 명분을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 거대 일본을 통해 중국에 대항하려고 했다. 그것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투쟁이다. 다행히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제적인 정세를 읽고 뚝심으로 한미동맹을 맺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지배로 전락되는 치욕스런 일을 면한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G2로 등장하자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대통령은 중국을 적대국가로 대하는 것이 동반자로 대한다. 이전의 남한과 미국과 일본의 해양세력과 북한과 구 러시아와 중국의 대륙세력과의 대결구도는 소멸된다. 그런데 이런 낡아빠진 이념을 부르짖고 있는 골빈 놈들이 한반도에 아직도 건재하며, 초등학교수준의 지식으로 이념논쟁을 불러 일으켜 시끄럽게 한다.
그러면 니토베가 쓴 부시도(武士道)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이 책 서문은 니토베의 집필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도덕과 윤리 체계가 있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듯이 일본엔 부시도가 있다.“ ”부시도는 그 표징인 벚꽃과 마찬가지로 일본 땅 고유의 꽃이다.“ 일본에는 콕카(こっか, 國花)가 없고, 일왕실을 상징하는 꽃으로 국화(菊花)가 있을 뿐이다. 사쿠라(さくら, 桜 벚꽃)는 일제히 피었다가 한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사무라이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런데 사쿠라(さくら, 桜 벚꽃)의 원산지는 제주도다.
니토베는 일본그리스도교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절친한 친구로서 삿뽀로 농학교부터 미국유학생활까지 같이 한다. 그는 전쟁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며 병역거부를 최초로 보편화한 퀘이커교(Quakers)신자이다. 그런 그가 아이러니컬하게 국가를 위한 살인은 예수의 희생처럼 고귀한 것이며, 칼의 도덕을 찬양한다. 이것이 한반도종교인과 일본열도의 종교인과의 차이점이다.
우치무라 간조도 영문저서‘일본과 일본인‘(Japan and The Japanese, 日本及び日本人)’(1894)을 쓸 때에는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 1894-1895)을 의로운 전쟁이라고 칭송했으나, 러일전쟁(露日戰爭 Russo-Japanese Wars 1904-1905)의 참혹성을 깨닫고, 책 제목을 ‘대표적 일본인’(Representative Men of Japan, 代表的日本人으로 바꾸어 1908년에 다시 펴낸다. 이 저서에는 일본인을 대표하는 5인이 소개되어 있다. 그들은‘정한론’(征韓論)을 주창자이며 신일본의 창시자 다카모리(西鄕隆盛), ‘탁월한 농촌경영자’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 ‘농민 성자’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 ‘일본 양명학의 시조’ 나카에 도쥬(中江藤樹), ‘일본 불교의 상징’니치렌(日蓮)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전형적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さいごうたかもり, 西鄕隆盛)의 “충성, 용기, 결단력, 헌신”을 일본인의 대표적 덕목으로 선전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하급무사집안 출신으로 메이지유신(めいじいしん, 明治維新)의 주역이 되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시대를 종결시키고 천황중심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성공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1971년 11월 미국과의 불평등한 조약에 의한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메이지유신(めいじいしん, 明治維新)으로 인해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 계급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조선정벌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고,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가고시마(鹿兒島)에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와 사립학교를 경영하면서 후진양성에 진력하다가, 중앙정부와의 대립을 세우고 1877년 사쓰마 번 무사들의 반란인 세이난(西南) 전쟁의 패배 후 자결한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좌우명은 "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존경을 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다" (敬天愛人)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본이다.
니토베의 가공된 부시도(武士道)는 일왕에 대한 일방적 충성만을 강조한다. 일왕에 대한 의리강조가 뒤틀려 나타난 것이 조직 폭력 그룹인 야쿠자(ヤクザ, やくざ, 役者 yakuza)다. 일본은 집단최면에 걸린 듯 허구의 부시도(武士道)정신으로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러일전쟁(露日戰爭 Russo-Japanese Wars 1904-1905)에서 승리한다. 이 승리는 황색인종이 세계 최초로 백인을 이겼다는데 의의가 있고, 21세기에서도 일본은 이 사실에 자긍하며 들떠있다.
가공된 부시도(武士道)가 영화로 상영되어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 대표적인 시대극이 겐로쿠 아코우 지켄(元祿赤穂事件)이라고도 불리는‘주신구라‘(忠臣藏)다. 그 실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1701년 3월 4일 현재 효고(兵庫) 현인 옛 아코우번(赤穗藩)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矩)가 바쿠후(幕府)의 고관이자 미가와국(三河國, 현재 아이치현 일부) 다이묘 (だいみょう, 大名) 기라 요시나가(吉良義央)부터 모욕을 당하여 참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바쿠후(幕府)의 명으로 할복하자, 47명에 달하는 그의 가신들이 1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1702년 12월14일 밤 주군(主君)을 죽게 만든 기라의 저택을 들이닥쳐, 그의 목을 베어 어느 절의 경내에 있는 묘 앞에 바친다. 이날의 거사로 인해 바쿠후(幕府)으로부터 역시 할복자결을 명받아 눈 내리는 날을 기해 16살짜리 소년을 포함한 충직한 부하들이 주군(主君)의 무덤가에서 전원 할복자살한다.
니토베는 ‘부시도’(武士道)에서 할복의 이유를 '복부에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인 신앙에서 용사의 배를 갈라 무사도를 지키는 자결방법으로 적절히 여겨졌다' 고 기술한다. 니토베의 소설화한 할복찬양론은 기가 막힌다.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부시도(武士道)의 극치가 '하가쿠레‘(葉隱)정신이다.‘주신구라‘(忠臣藏)의 47명의 사무라이 이야기는 성리학사상으로 무장된 성자유형의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일본을 용감무쌍한 영웅형 나라로 각색한다. 현재까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TV드라마 가부키(歌舞伎) 등이 수천여 편 제작, 상연되었다.고이즈미 준이치로(こいずみじゅんいちろう, 小泉純一郎)전 총리는 취임 직후 도쿄의 센카쿠지(泉岳寺)를 찾아 47인의 사무라이 이름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부르며 분향했다. 그는 주군을 위해 스스로를 버린 행위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들이 주군의 무덤가에서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전 일본인의 가슴에 살아 있게 됐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구미선진국을 비롯해서 세계인은 모두 일본인들은 모두 니토베의 부시도(武士道)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니토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퀘이커교(Quakers)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홋카이도(北海道)와 타이완(臺灣)에 대한 식민수탈을 선도하며,“식민은 문명의 전파”라며 침략을 옹호한다. 그는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いとうひろぶみ, 伊藤博文)의 촉탁(囑託)으로 조선 전국을 답사한 후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한다. “조선인은 그 풍모로 보나 생활 상태로 보나 도저히 20세기의 인종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원시적이며, 민족으로서 생존의 기한은 끝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조선반도에 드리우고 있는 것은 죽음의 그늘뿐이다.”“조선인의 생활풍습은 죽은 풍습이고, 조선인은 민족적 명맥이 끊어지려 하고 있다. 이 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경제와 국방을 등한시하고 허구한 날 신분제도를 강화해주는 원시형노예성리학의 예론에 빠진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러면 니토베의 부시도(武士道)가 왜 사기인가를 밝혀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とよとみのひでよし 豊臣秀吉)는 민간으로부터 병기(兵器)를 모두 압수해 전쟁하는 사람은 전쟁만 하고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만 짓는다는 병농분리제(兵農分離制)를 정착시킨다. 에도시대(江戸時代)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 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사무라이(ぶ-し, 武士)라고 칭한다. 쇼군(将軍)은 바쿠후(幕府)의 수장이고, 다이묘 (だいみょう, 大名)는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바쿠후(幕府)로부터 부여받은 무사이다. 메이지유신(めいじいしん 明治維新)이전의 일본은 바쿠한체제(幕藩體制)다. 중앙정부는 바쿠후(幕府)고 지방정부는 한(はん, 藩)이다. 그런데 에도바쿠후(江戶幕府)는 사무라이(さむらい)나라가 아니라 성리학을 숭문하는 나라로 변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자.
정유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에 의해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의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등에게 전파되어 일본의 에도바쿠후(江戶幕府)는 퇴계의 성리학을 토대로 한 숭문(崇文)의 시대로 들어가며, 장기적 평화시대가 시작된다. 부시(武士)교육보다 성리학경전과 문장 익히기를 중요시 여기는 에도바쿠후(江戶幕府)의 사무라이(さむらい)는 총인구의 10%에 불과했고, 나머지 90%의 민간인은 칼을 차고 검술을 배울 권리조차 없었다. 사무라이(さむらい)들에게는 ‘키리스테 고멘’라고 하는 특권이 있다. 이것은 칼을 찬 사무라이(さむらい)에게 반항하는 자는 베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서 윗사람은 바꿀 수 없다, 곧 윗사람에게 대들지 말라는 ‘오카미와 카에나’사상이 발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사무라이(さむらい)에서 일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야수쿠니신사(やすくにじんじゃ, 靖国神社)는 사무라이(さむらい)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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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메이지유신(めいじいし, ん明治維新)이전의 에도바쿠후(江戶幕府)의 일본의 통상적 이미지는 칼잡이 사무라이(さむらい)의 나라라기보다는 점차 조선소중화주의처럼 일본형 화이사상을 대변하는 나라다. 그런데 니토베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사무라이정신을 서양의 기사도,‘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그리고 성리학사상과 잘 믹스해 가공된 부시도(武士道)를 만들어낸다. 독창적인 새로운 일본문화를 창조한 공헌으로 일본정부는 그의 초상을 1984년부터 2004년까지 5000엔짜리 지폐에 사용한다.
니토베는 일본인답게 제국주의자 또는 식민주의자라는 이미지를 국제연맹 사무차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평화주의자 또는 국제주의자로 바꾼다. 그러나 그는 일본 내에서 ‘식민정책학의 제 1인자’로 불린다. 일본의 종전(終戰)과 더불어 식민지상실과 식민정책학의 해체정책에 따라 5000엔짜리 지폐에 새겨진 그의 초상화가 사라진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일본은 가공된 부시도(武士道)를 중시하지만,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자학적 역사관’으로 매도하기 때문에, 부시도(武士道)의 풍모를 찾을 수 없음은 물론 부시(武士)체취조차 느낄 수 없다. 그저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얍삽해 보인다. 원래 부시도(武士道)가 없고 가공된 니토베의 부시도(武士道)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부시도(武士道)의 기원은 한반도로부터 왜(倭)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 가운데서 고구려인들에게서 유래된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사절단으로 일본에 와 있던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이 716년 고구려유민 1799명을 이끌고 사이타마(埼玉)현 남서부에 있는 히다카(日高)시에서 정착하며, ‘코마군’(高麗郡, 후에‘고마노사토‘高麗鄕로 불림)을 형성한다. 곳곳에는 고마지(高麗寺), 고마가와(高麗川)등의 지명이 남아 있고, 약광(若光)을 모시는 ‘고마진자’(高麗神社)도 있다.
고구려유민들은 세공, 직물, 철제 등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어서 철제 농기구로 일본의 농작물 수확량을 늘리고, 일본인들에게 제지기술까지도 전파한다. 뿐만 아니라 기마술과 철제기술이 뛰어나 관동일대에서 일본사무라이의 기원의 무장집단을 형성한다. 훗날 발견되는 말등자, 철제마주, 고구려벽화에 등장하는 말의 깃대 등은 이 지역이 준마의 명산지임을 증명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 고분(장군산고분)에서 출토된 동완, 장식대도, 철제마주, 철제무기 등 많은 뛰어난 유물들은 철갑무기와 말을 사용한 철갑기마민족, 곧 고구려유민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에도바쿠후(江戶幕府)의 일본이 친(親) 성리학, 친(親)조선이었다면, 메이지 유신(めいじいしん, 明治維新)이후의 일본은 반(反) 성리학, 반(反) 조선이다. 그래서 니토베의 가공된 부시도(武士道)는 일왕사상으로 연결되고, 일왕의 위패가 신당에 있기 때문에 신도(神道)가 일본의 민족신앙으로 자리 잡는다.
일본은 구미선진국에겐 깍듯이 예의를 지켜 아시아의 앵글로색슨족이라고 인정받고, 약자인 타국가는 매몰차게 대한다. 구미선진국은 이런 일본의 가공된 부시도(武士道)를 찬양한다.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는 일본으로부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구미선진국의 언론플레이만 믿고 일본인이 집단에서 이지메(いじめ)당하지 않으려고 3.11사태에서 보듯이 저항하지 못하는 처절한 노예형인간임을 깨닫지 못하고, 일본을 위대한 사무라이(さむらい)나라라고 착각한다. 사실 일본인은 서구콤플렉스를 치료하기 위해 병적으로 아시아에 대한 우월의식이 몸에 배어있다. 그런데 이런 사기극에 부화뇌동하는 한국 쪼다들과 또라이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서 요한의 복음서 8장 44절을 통해 악마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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