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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은 독립문, 이런 사정 때문이다"(강추!강추!강추!)

아우구스티누스 2014. 10. 22. 09:47

독립문이 일본의 약탈침략병탄시기에도 잔존한 이유는 제1차적으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 청나라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의 내용에 담겨있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독립문존재는 일본이 조선을 중국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먹은 것임을 당시 서구열강에게 보여주고 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 현판글씨를 매국노 이완용이가 썼기 때문에, 일본은 이런 호재(好材)를 잘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가 일본처럼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의 당시 서구열강들과 교류하여 그들의 과학기술, 군대시스템, 경제시스템 등 선진문명을 받아들였더라면 오히려 일본이 이룩한 것보다 훨씬 위대하며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텐데, 달랑 중국명나라만 상대하고 그것도 중국청나라마저 거부했지만, 그래도 대한제국시절에 서구열강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근대국가로 거듭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지배층이 부정부패부조리로 찌들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조선백성이 게을러터져서, 일본으로부터 모진 시련을 겪었다고 보지 않는다.

 

일본은 중국대륙과 멀리 떨어져서, 당시 세계 최강 서구열강들이 중국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대로 일본을 방문했지만, 한반도는 대륙과 근거리에 있기 때문에, 서구세계는 중국의 위압감 때문에 조선왕조방문을 주저하여, 한반도는 세계문명사회로부터 고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가 상고시대부터 메이지유신이전까지 일본열도의 스승이었는데, 오히려 그 제자가 그 스승을 근친상간한 것이다.

 

그러면 일본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행위를 지켜보자.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상징으로 제작... 이완용이 현판 글씨도 써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서울시 서대문구 무악재 고개를 신나게 내려오다 보면 도로가에 널찍하게 자리한 독립문공원이 나타난다. 머리 위로 인왕산이 보이고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나무들이 풍성해 잠시 쉬어가곤 하는 곳이다.

 

이 독립문 공원엔 명소가 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외에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서재필 동상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이국적인 모양새로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독립문(사적 제32호)이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세운 19세기 말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독립'이란 이름 때문에 언뜻 보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지어진 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반일(反日)의 상징이 아니라 반청(反淸)의 상징물이다.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자주국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고종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든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뜻 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조선의 '독립'을 원했던 일제의 검은 속셈

 

독립문은 그 취지대로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세워졌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영은문은 '은혜로운 이들을 맞이하는 문'이란 뜻의 문이다. 여기서 은혜로운 이들이란 중국 사신(당시엔 청나라)을 말한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독립문 바로 앞에 영은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아직도 있다.

 

조선이 오랫동안 취했던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의 상징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지을 수 있었던 건 당시 강화도로 쳐들어와 강제로 조약을 맺은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시대적 상황과 이어진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된 후, 독립문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 11월에 완공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 청나라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는 이렇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일본은 단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국 지위를 무력화하고 아무런 간섭 없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명시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독립문은 '독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일제 강점기하에서 무사히 존속했다. 독립문은 사대의 상징을 허물고 지은 또 다른 식민지배의 상징이 됐다. 그런 독립문의 운명은 현판 글씨에서 이미 운명지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독립문은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 홍예문의 중앙 이맛돌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李花, 오얏꽃) 무늬가 방패 모양의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이맛돌 상단 앞뒤에 가로쓰기로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각각 쓰여있고, 그 양옆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역사의 아픔과 모순 서린 독립문

 

1924년 7월 15일 <동아일보>의 '내 동리 명물'이라는 연재기사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당시 명필로 유명했던 조선 귀족 후작 각하가 쓴 것이라 나온다. 그는 바로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고 부귀영화를 누린 매국노 이완용이다. 그가 독립문의 현판글씨를 쓸 수 있었던 건, <독립신문>의 가장 큰 경제적 후원자이자 독립협회 주요 요인으로써 독립협회를 이끌었기 때문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는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에 모인 수천 명의 동포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까지 했다.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치려고 한다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처럼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등 '독립' 두 글자만 들어가도 순사들이 눈알을 부라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절에도 독립문은 '독립' 두 글자를 달고도 온전히 살아남았다. 탄압은커녕 오히려 당국의 보호와 배려를 받았다. 일본은 항일 운동가들을 서대문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탄압하면서도 바로 옆 독립문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고적 제58호로 지정해 보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