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철학 이야기

조선일보 "서해안 해상세력 집안"(강추!)

아우구스티누스 2014. 10. 13. 12:48

조용헌 원광대학교동양학대학원 교수의 담론 속에서 조선왕조가 바다의 중요성을 단 한번도 생각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주국방도 갖추지 않는 상황에서 일제의 먹이감으로 전락했는데, 21세기와서도 한미동맹아래 핵 및 핵미사일소유와 더불어 하늘과 땅과 바다의 우주전역을 방어하는 자주국방을 갖추어야 하는데, 국방외교를 전적으로 미일에게 의존하는 노예국가의 모습을 읽는다.


게다가 군조직도 공군과 해군 위주로 재편성되어야 하는데 구태의연한 시스템을 고수하며 아무 쓸모가 없는 별들만 잔쯕 만들어 놓고 있고, 그렇다고 전쟁을 주도하면서 방위산업과 최첨단 우주산업을 발전부흥키는 동시에 일자리창출을 뛰어넘는 국부창출로 세계최강자리를 선도유지하고 있는 미군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군은 목숨이 두려워 전쟁은 고사하고, 해외파견도 미군과 전쟁에 동참하여 최첨단우주전쟁노하우를 전수받아야 하는데, 비전투분야만 담당하려는 노예스러운 태도 때문에, 해외파견 보람이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군은 무신정권(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이 심어놓은 '구타고문살인', '성노예, 성폭력' 등의 '사단의 사망문화'만 추종하려고 난리법석이다.

여하간 육지는 물론 바다와 하늘의 전쟁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조교수의 언설에 귀기울여보자.


서남해안에는 옛날부터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사람과 물건이 오갔던 해상 거점이 있었다. 지명에 '당(唐)'자가 들어가는 지역은 당나라와 무역이 활발했던 항구들이었다. 당항포(唐項浦), 당진(唐津), 당항진(唐項津) 등이 그런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 집안도 통일신라 말기에 개성과 예성강을 통해 서해안의 물류 거점을 장악했던 해상무역 집안이었다. 서해안에는 왕건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해상 세력 집안이 있다. 남양 홍씨(南陽洪氏) 집안과 나주의 오씨(吳氏) 집안, 나씨(羅氏) 집안이 대표적이다. 이 집안들은 왕건 세력과 바닷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왕건은 왜 나주부터 공격하였는가? 나주는 내륙이지만 영산강을 통해 지금의 전남 신안군 일대 수십여 섬과 어미닭·병아리 관계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해상 도시였다. 당시에 해류와 바람을 제대로 타면 나주에서 개성까지 배로 2~3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 고속도로였다. 그래서 개성과 나주는 음식이 비슷하다고 한다.

나주의 오씨 집안 딸이 바로 왕건의 부인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 부인이다. 금성(錦城) 나씨 집안 시조인 나총례(羅聰禮)도 왕건에게 적극 협력해 나중에 '삼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남양만 일대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홍씨 집안 아들 홍유(洪儒)를 왕건의 부장으로 내준다. 홍씨가 세거하던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南陽灣) 일대는 평택·수원의 곡창지대와 곧바로 연결되는 물류, 군사적 요충지였다. 화성시 서신면에는 삼국시대부터 수군 방어 기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당항진의 위치를 이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야산에다 석축을 쌓아 구축한 당성(唐城)도 바로 서신면에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왜구들이 곡식을 탈취하려고 수시로 침입했던 지역이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조에서는 영종포첨사(永宗浦僉使)가 있던 수군 진지가 해운산(海雲山)에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해상무역의 유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천 년이 넘게 남양만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토박이 남양 홍씨 옥란재(玉蘭齋) 집안은 이 유적지가 훼손될까 봐 걱정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