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철학 이야기

비굴하고 추접스러운 이인호의 변호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한국인들!

아우구스티누스 2014. 9. 11. 12:00

보통 80에 가깝거나 80을 넘으면 저쪽으로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거나, 정신이 오락 가락하여,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해 기저귀 차고 다녀야 하는 등의 행동으로 정상적인 공직생활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올드 걸 댓글 대통령은 쪽발이 였던 부친 박정희명예회복을 위해, 자기 모친 뻘되는 노인네를 한국방송(KBS) 신임 이사장으로 내정했고, 그 할멈도 조부 이명세의 친일행적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 위해 그 자리를 수락했다. 


마침내 대한민국은 뉴라이트계열의 등장으로 사상적으로 일본의 노예, 시다바리국가로 전락했다. 분하고 원통할 뿐이다. 조선인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조선국토수호를 위해 목숨을 던지며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오히려 매국노가 되었다.

이인호 올드 걸은 "당시 일제가 요구하는 협력의 글을 쓰실 수 밖에 없는 위치에 계셨지만 본인 목표는 서양 사조에 맞서 유학의 영향력을 증대시키자는 데 있다"는 궤변으로 조부 이명세를 변호하지만, 이명세는 47세 때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일제강점기 때, 1939년 10월 16일 조선총독부가 전조선 유림총의를 움직여 조선 유림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조직한 관변단체) 상임참사(49세 때인 1941년 상임이사)로 활동하면서 이곳을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부식(扶植), 지원병(志願兵)의 권장, 황군(皇軍)후원, 국방헌금(國防獻金)등을 위한 교육강좌와 강연회를 통해 황도유학(皇道儒學: 일제의 조선식민지배에 논리적 정당성을 준 친일 유학)을 적극 선전했다. 

이명세의 악질 친일행위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고찰 할 수 있다.

(1) 1942년 조선유도연합회 기관지인 '유도' 창간호에 실린 '우리 일본이 동아시아 공영권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유교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에 관한 기고문을 일별해보자. 

"나라를 세운 이래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드는 빛나는 역사를 가지며, 세계 인류를 위해 최고 문화의 건설을 사명으로 하는 우리 일본은 이번 대동아전쟁을 계기로 동아 신질서 건설을 실현하고자 또 하나의 걸음을 내디뎠다"

"이 아름다운 황도 정신을 일본 국민만 독점하지 말고 전 세계에 널리 선전하여 세계 인류로 하여금 빠짐없이 황화(皇化)를 하도록 함으로써 공존공영이라는 황국 본래의 이상(理想)의 완수를 향하여 일로매진하는 것이 도의국(道義國)인 일본 전래의 사명이다"

"우리 황군은 인의를 위하여 싸우기 때문에 무적이다. '인자무적'이라고 말한 선현의 격언이 현재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유림이라는 사람들은 우선 우리 국체의 존경과 현대의 중대 시국을 인식하고, 종래부터 습득해온 유교 정신을 황도 정신에 합치시켜 황국신민으로서의 길을 실천궁행함으로써 국가적인 대(大)사업에 공헌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2) 동일한 잡지 '유도'에 실린 한시 ‘축 징병제 실시’ 내용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해마다 북벌에 또 남벌/이제야 반도의 병력을 새로이 징발하시니/내외(內外)가 한결같이 은혜를 입게 되었네."

"집안에선 아들 난 것을 중한 일임을 더욱 알고 나라 위해 죽는 것은 가벼이 여겨야 하리/우리들은 후회 없나니 하루빨리 전란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 되길 바랄 뿐이라네" 

(3)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 같은 잡지 '유도'에, ‘정기가의 해설’(正氣歌の解說; '정기가'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위해 호연지기를 기를 것을 촉구하는 글로서 후지타 도오코나 요시다 쇼인 같은 일본 유학자들이 지은 것임)을 통해 정기가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일제의 전승을 기원하기도 했다. 

"정기가는 송나라 문천상의 창작물을 기원으로 하고, 우리나라의 명유인 후지타 도오코, 요시다 쇼인 같은 여러 선생들이 이것을 모방하여 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명세는 이승만 정권 때 1957년 7월 11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을 축출하라는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서, 폭력으로 심산을 성균관대학과 유도회에서 쫓아내,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에는 자신이, 총장 자리는 이선근(일제 때 만주에서 관동군에게 군량미를 납품하던 인물)이 차지하도록 했다.

심산은 정통 유학자 집안의 후손으로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지체 부자유의 앉은뱅이가 되어, 자칭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이란 별호를 사용한 독립투사인데, 1946년에 이명세와 같은 유림 내부의 썩은 유생들을 몰아내고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조직하면서 그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동년 친일파가 설쳐대던 성균관을 정화한 뒤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학장·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55년 재단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사실 심산은 이승만정권 때 독재와 부패행각을 공개적으로 비난해 보복에 시달렸으며, 6·25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 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내 이승만정권과 투쟁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성균관대학과 유도회에서 추방당한다. 이명세는 이승만의 충실한 하수인 이었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펴낸 것에서도 이명세의 적극적인 악질친일행위가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 

"이명세는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참사·상임이사를 역임했으며, ‘황도유학’을 주장하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찬양했으며,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의 업적을 칭송했고, 일제 말 징병제 실시까지 찬양했다."

필자는 대한민국국민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겠다.

첫째, 왜 국민들은 악질 친일세력, 일제 사생아 후예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파렴치한 친일행위를 참회하기는 커녕 오히려 두둔하면서 대한민국의 지배층으로 활동하는데 퇴진운동을 벌이지 않는가? 

둘째, 쪽발이 딸이 불법으로 청와대에 입주한 이후, 마침내 대한민국을 일본의 시다바리국가로 전락시키고 있는데, 왜 국민들은 하야운동을 벌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가? 

결국 국민들도 대부분 악질친일세력, 일제사생아의 후손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