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철학 이야기

조선일보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추천)

아우구스티누스 2014. 8. 30. 10:14

박홍갑의 ‘산처럼’은 조선황실가계가 ‘우남 이승만은 노비출신’이라고 한 평가가 확실성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박’‘김’‘이’를 성으로 가진 사람들은 물론 타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노비출신이 많음을 증언하고 있어 추천한다. 


사실 조선시대엔 대략 5-10%양반층, 10-15%중인층을 제외하곤 거의 노비라고 보면 된다. 

인류역사 가운데 자기 동포를 노예로 부린 민족은 조선왕조와 인도 두 나라 뿐이다. 타국은 모두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패전한 국민을 노예로 삼았다. 하늘의 심판으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모진 시련을 당한 것이다.

이런 비굴한 국민성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세월호대참사의 희생가족의 단식에 대한 조롱이 언론이나 매스컴에 흘러넘치고 있다. 반드시 하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거의 100% 소설화된 족보이야기를 일별해보자.

'덕수 이씨'인 충무공 이순신은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외직에 나갔을 때를 제외하면 한양과 충청도 아산에서만 살았다. 개성 남쪽 마을인 경기도 덕수에 살았거나 다녀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도 이순신은 덕수 이씨다. 율곡 이이 역시 '덕수 이씨'지만 태어난 곳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이었고, 한양과 경기도 파주에서 주로 살았다. 덕수는 조선 태조 때 해풍군에 편입됐다가 다시 풍덕으로 통합됐다. 고을 이름은 없어져도 덕수라는 본관은 변하지 않는다.

본관은 옛 조상이 살았던 본거지로 같은 본관을 사용하면 피를 나눈 혈족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경상도 출신 나주 정씨, 전라도 출신 김해 김씨도 본관을 바꾸지는 않는다.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문벌 의식 때문이다. 그것은 '허위의식'일 수 있지만 현재의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자존감의 근거도 된다.

본관은 스스로가 양반이라는 인식을 내세우는 수단이 된다. 중국에는 시조가 두부 만들던 사람도 있는 반면, 한국인은 거의 모두 유명 인물의 후손임을 자랑한다. 조선 후기 특정 가계를 통째로 어느 인물의 후손으로 둔갑시켜 족보를 만드는 일이 많았다. 다산 정약용은 이 같은 풍토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갈아치우는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탄했다. 그래도 성(姓)까지 바꾸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리말에서 결백을 주장하거나 다짐을 할 때 '차라리 성을 갈겠다'고 하는 것은 '본관'은 몰라도 '성'은 바꾸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때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된다. 적어도 7세기 이전에는 성이 없었다. 6세기 건립한 진흥왕순수비에는 수많은 수행 인원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성을 사용한 예는 찾을 수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을 지낸 저자는 기존 연구 성과를 들어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다는 박·석·김의 세 성씨 역시 후대에서 소급해 붙인 것으로 본다. 본관은 고려 초기인 10세기 중엽 이후 나타났다. 애초 본관은 지역별로 세금 부과 등 정책 실현을 위한 도구였다.

족보의 복잡한 형태 등을 설명하는 앞부분 1부의 설명이 지루한 독자는 2부부터 읽어도 좋다. 성씨와 족보를 통해 우리 역사와 사회 밑바닥에 흐르는 저류(底流)를 되돌아보게 한다.